1963년은 독립운동가 중 상당수가 생존하여 그분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인우보증에 의해 유공자가 선정되던 시기였다. 생존한 동지들이 오래전 북간도에서 사망한 한상렬 선생을 잊지 않고 우선적으로 포상했다는 것은 선생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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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인 한상렬 선생은 횡성의 전설이었다. 횡성군 우천면의 대지주이자 강원도 보부상의 두목이던 선생은 1907년 3백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킨 이래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한 후에는 13도 의군, 공교회, 창의소 등에 참여했으며, 간도로 건너간 후에는 대한의용부, 대한군정부, 성동무관학교, 대한의용군, 군무도독부, 신민부, 대한독립단 등 중요한 단체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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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기세는 대단했다. 총대장은 민긍호였으나 서로 연락이 쉽지 않으니 수백 명 단위로 편성된 부대들이 독자적으로 결정권을 갖고 자기가 맡은 영역의 도시와 마을의 일본인들을 공격하고 다녔다. 마치 사방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난 듯, 한반도의 중동부 지방에는 한동안 총성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이끄는 횡성 의병이 첫 전투를 벌인 곳은 여주였다. 무장봉기 일주일 만인 1907년 8월 12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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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긴급 편성된 일본군 토벌대가 몇 갈래로 나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의병대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언제 어디서 그들과 부딪힐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전력이 압도적이거나 교전을 피할 수 없는 긴급 상황이라면 일본 군대와 싸워야겠지만 의병의 일상적인 타격 목표는 그들의 통치 기관이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경찰서·관공서·우체국·금융기관을 파괴하여 통치 행위를 마비시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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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네. 열강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은가? 우리의 억울함을 들으면 불쌍하다고 동정은 할지 모르지. 그러나 어느 나라도 우리 한국인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왜인들을 죽이지는 않을 걸세. 왜냐하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열강들은 제각기 영토를 넓히기 위해 우리 같은 약소국을 침략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은 이미 한국의 참상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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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천우신조와 같은 일이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내일을 모르는 처지일세. 동해안을 오르다가 적에게 발각되어 죽을지, 두만강에서 국경수비대의 총에 맞을지 알 수 없네. 연해주에 가는 것도 그곳에 숨어 있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국내 진공을 하기 위함이니 죽는 건 마찬가지일세.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살아날 가망이 없는 싸움에 뛰어든 전사들일세. 언젠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최초의 맹세를 지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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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간 이들의 마음을 안다. 이미 우리는 마음속에서 자신을 죽인 사람들이다. 생명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낡은 유교의 인습을 버리고 전장으로 떠나온 우리다. 산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는 우리가 죽은 후 몸뚱이가 어디 묻힐까를 걱정하겠는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걸린 일, 아무 애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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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경의 잔인한 탄압은 공포보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북간도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제는 다수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장한 시위대는 일본 경찰서와 일본인 상점, 일본인 가옥을 공격하며 일본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훈춘현에서는 동구·황구·남별리의 주민들이 3월 20일에 시내에 모여 반일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대 중 수백 명이 무장을 갖추고 있어 일본 군경도 감히 교전을 하지 못했다.
--- p.204
나의 총구는 척후병들을 앞세워 뒤에서 말을 타고 건들거리며 따라오던 일본군 소위를 겨냥하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익숙한 격발음과 함께 귀청을 찢는 폭음이 들리고, 거의 동시에 총알이 일본군 소대장의 누런 군복을 관통했다. 내가 쏜 총알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떠오르는 사이, 앳된 얼굴의 소위는 허리가 꺾이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p.243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장교를 지망하여 온 도살자들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용서를 해주어야 할 한국인들은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우리는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짐승도 안 하는 악귀 같은 짓을 벌이는 일본인들을 죽임으로써 죽은 우리 동포를 위로하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나는 나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일본군 장교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 p.244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총과 총알, 담요와 식기도구까지 어깨에 메고 산중을 돌아다니며 전투를 벌이는 대원들은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한 대한의 전사들이었다. 빛나는 투지를 감당하기에 아군의 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부상당한 전우가 마지막 한 알의 총탄을 남겨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하는 처절한 광경을 몇 차례나 보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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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를 낙엽 아래 묻을 때마다 눈물을 떨구며 다짐했건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독립군이 된 이상, 전사로 살다가 전사로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 밖에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었다. 독립 투쟁의 전선에서 이탈하는 순간 정의의 신념을 잃는 것이요,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 p.247
1920년 말, 훈춘사건 등의 사건을 통해 만주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한국인은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이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집계한 숫자만 봐도 3,469명이 죽고 3,520동의 가옥이 재가 되었다. 명동학교 등 한국인 학교 25동도 파괴되고 소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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