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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창비 | 1999년 1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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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1999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35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36410032
ISBN10 893641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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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니까 상가를 알리느라고 달아매놓은 붉은 종이 호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잔등의 불빛이 어둠속으로 멀리까지 쫓아왔다. 혜자는 다시 돌아갔다. 동편 하늘에 새벽빛이 부옇게 번졌고, 이층집 지붕이 어둠과 경계를 지으며 하늘속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혜자는 종이 등피를 쳐들고 거의 다 타버린 촛불을 껐다. 첫차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그애는 역까지 뛰어서 갔다. -한씨연대기-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 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삼포가는 길-
--- p.183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는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 p.
'같이 가시지 내 보기엔 좋은 여자 같군' '그런 거 같아요' '또 알우? 인연이 닿아서 말뚝 박구 살게 될지. 이런 때 아주 뜨내기 신셀 청산해야지' 영달이는 시무룩해져서 역사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백화는 뭔가 쑤군대고 있는 두 사내를 불안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달이가 말했다.

'어디 능력이 있어야죠'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원짜리 두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뒷차를 탈 텐데......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에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않을께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이 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후에 기차가 떠났다.
--- 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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