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도착한 장소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였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오래된 구덩이였지. 두더지 가족이 살기라도 하는 것마냥 깊숙하고 어두침침했거든. 더럽고 질척한 진흙투성이에다 꿉꿉하고 눅눅하고 불쾌한 습기가 가득하지 뭐야? 게다가 한기가 돌아서 으슬으슬 춥기까지…….
흙바닥에는 마치 공룡의 것인 듯 커다란 뼛조각들과 까맣게 썩은 이 여러 개, 먼지가 부옇게 덮인 책, 그리고 녹이 잔뜩 슨 쇠고리가 나뒹굴고 있었어.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자욱한 안개와 뿌연 먼지 때문에 코가 간질간질했어.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날 것 같았거든. 사실은 여기 있는 물건 하나하나마다 거스의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나 봐.
“웩! 여긴 냄새가 너무 지독해! 넌 내 기억이 몽땅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도 알아. 내 머리통에 금이 갔다나 뭐라나. 그것 때문에……. 맞아, 사실 좋은 일은 아니지.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다 기억해야 하는 건데? 옛날 일 따윈 잊어도 상관없잖아. 난 괜찮다고!”
--- pp.40-41
“거스, 다섯 살 때 기억들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지 않아? 조그맣던 네가 커다란 상자에 쏙 들어가 몸을 숨겼던 일이나, 생일에 엄마 아빠랑 무얼 했는지, 또 그 무렵에 가장 좋아한 음식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들 말이야. 거스, 천천히 잘 떠올려 봐.”
거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
“싫어. 난 아까처럼 그냥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더 좋아!”
나비는 침착하게 다시 말했어.
“기억은 저절로 다가오기도 해.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것처럼 빠르게, 또는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천천히……. 어떤 기억은 무척 행복하지만, 어떤 기억은 상어가 덮치는 것처럼 끔찍하지. 깜깜한 밤에 갑자기 어딘가에 쿵 부딪히듯 불쑥 떠오르기도 하고. 기억은 네 머리 속에 머물면서 너와 함께 춤을 추다가, 네가 까맣게 잊어버릴 때면 네 머리 속 기억 상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려. 사람들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네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기억은 모든 걸 품은 채 너에게 딱 붙어 있거든.
기억나? 네가 좋아하던 생선 튀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톡톡 소리가 나는 뽁뽁이 비닐, 하도 오래돼 쩍쩍 갈라져 버린 분홍색 비누, 녹이 잔뜩 슬어서 물을 틀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를 내던 수도꼭지.참, 햄스터도 한 마리 키웠잖아. ‘미스터 잭’ 말이야. 이름도 네가 지었는데……. 그 녀석이 네 손가락을 꽉 물어서 속살이 다 드러날 만큼 다치기도 했지. 그때 너, 엄청 아파 했잖아.
〔……〕 이제 다 기억났지? 그러니까 자꾸 잊지 마. 네 기억들은 모두 머리 속에 고이 들어 있으니까.”
--- pp.42-44
나비 말이 맞아. 거스는 숨기는 게 하나 있었어. 마음속 작은 상자에 깊숙이 넣은 다음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두고서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던 비밀이……. 거스는 그 비밀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고, 누구한테 보여 주기도 싫었지. 그 비밀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고 다 털어놓으면 거스의 마음속에 비밀이 머무를 곳이 없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거든.
“사실은 너무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문득문득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꾹꾹 눌러 두곤 했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그 생각을 끄집어내면 이 현실이……, 그러니까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진짜가 될까 봐 무서웠거든.”
거스는 나비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어.
--- pp.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