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가르침은 초월적, 더 정확하게는 신적인 드러냄?하이데거가 존재의 속성이라 말하는 진실을 펼치고 접는 행위aletheia?을 ‘모방imitatio’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세속의 학문은 초급, 고급을 막론하고 신성하고 경전적인 교본과 원형의 모방이고, 그런 교본은 철학적, 신화적 낭독으로 구전되는 것이다. 교사는 듣고 전하는 사람, 촉발되고 훈련된 감수성으로, 계시된 로고스?“태초의 말씀”?를 파악하게 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토라 교사, 코란 해설가, 신약 주석가의 유효한 모델은 본질적으로 그것이다.
가르침의 기술과 행위가 (남용된 용어지만 제대로 된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스승이 제자에게서 배우고 그런 상호 관계를 통해 자신을 수정하는 일은 이상적인 교환 과정이다. 증여는 사랑처럼 상호적 행위가 된다. “내가 너일 때 나는 가장 나이다.” 파울 첼란은 말했다. 스승은 가치 없고 불충한 제자와 인연을 끊는다. 반대로 제자는 자신이 스승을 넘어섰다고, 이제 스승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낀다(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명령한다).
가르치는 행위는 말로 행하건 모범적 예시로 행하건 상관없이 인류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무리 고립되고 미개한 친족 집단이나 사회라고 해도 가르침과 배움, 숙련된 스승과 미숙한 제자가 없는 곳은 없다. 하지만 서구의 유산에는 특별한 원천이 있다. 우리의 학교 제도와 교육적 관행, 스승과 제자의 이미지, 학파/이론 간의 경쟁과 관련된 용례와 모티브에는 놀라울 만큼 기원전 6세기의 모습이 남아 있다. 우리의 강연과 세미나의 정신, 라이벌 구루들과 제자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주장, 가르침 자체의 많은 수사적 기술은 소크라테스 전대(前代)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수천 년 동안의 전승이 우리의 주요한 유산이자 이른바 서구 문화라고 하는 것의 축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우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구술성orality의 문제에 부딪힌다. 문자 이전에도, 문자 시대에도, 또 문자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어는 가르치는 일의 핵심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말씀한다’.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진실한 삶의 이상은 구술, 대면 전달과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교사와 사상가가 자신의 가르침을 소리 없는 글로 고정시켜 놓으면 곡해와 불충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진정한 가르침은 천직이고 소명이다. 사제직, 성직 용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미가 심리적, 역사적으로 모두 세속적 가르침에 흘러들어갔다. 히브리어 ‘랍비’는 단순히 ‘교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은 우리에게 역사 깊은 권위를 느끼게 해준다. 어린이나 농아자, 지적 장애인을 가르치는 낮은 단계?실제로는 전혀 ‘낮지’ 않지만?에서도, 예술, 과학, 사상을 가르치는 특권적 최상부의 단계에서도 진정한 가르침은 모두 소환의 결과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예언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또는 자기 양심 안의 합리성에게 묻는다.
진지한 가르침은 인간의 핵심에 손을 대는 일이다. 그것은 어린이 또는 성인의 가장 예민하고 깊은 곳에 접근하는 것이다. 스승은 침입하고 껍질을 깬다. 정화하고 재건하기 위해 파괴한다. 형편없는 가르침, 판에 박힌 교수법, 의식적이건 아니건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냉소적 교육법은 파괴적이다. 그것은 희망을 뿌리 뽑는다. 질 낮은 가르침은 폭력이며, 죄악에도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학생의 성장을 가로막고, 가르치는 과목을 답답한 어둠 속에 던져 넣는다. 그것은 배우는 사람의 감성에 유독한 산(酸), 지루함, 권태의 가스를 주입한다.
에로티시즘은 내밀하건 공공연하건, 상상된 것이건 실행된 것이건 모두 가르침에서, 사제지간의 현상학에서 뒤섞인다. 이 근본적인 사실은 성희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간과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변함없이 핵심적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장 이질적인 것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 이후 의문과 조롱 및 철학적, 정치적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질문하고 그 대답에 논박하는 기술은 평범한 의미의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응답자에게 불확실성의 과정, 즉 자기 의문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가르침에 대한 거부고, 비트겐슈타인의 먼 모델인지도 모른다.
문자는 암기술의 위축이라는 태만을 낳는다. 하지만 암기는 “무사 여신의 어머니”이고, 모든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타고난 재능이다. 이 명제는 심리적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선재(先在)와 불멸에 대한 논제에서 이미 보았듯이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암기한 텍스트는 우리의 현세적 존재와 상호 작용하면서 우리 경험을 수정하고, 또 변증법적으로 그 경험에 의해 수정된다. 기억의 근육이 강할수록 자신의 완전성을 잘 지킬 수 있다. 어떤 검열이나 국가 경찰도 기억한 시를 없앨 수는 없다. 대형 서사시와 건국 신화는 문자가 대두하면서 시들기 시작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오늘날 교육 제도에서 암기를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의식이 스스로의 밸러스트를 버리는 행위다.
“좋은 교사지만 저술이 없다.” 나사렛 예수가 테뉴어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하버드 대학의 썰렁한 농담이다. 그 배경에는 중대한 사실이 있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가르침을 글로 적지 않았다. 플라톤의 저작 전체에서 소크라테스가 두루마리를 들여다본 것은 단 두 번뿐이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의 글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우리 문명의 추축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수난 서사는 내적 알파벳, 우리의 도덕적·철학적·신학적 인식의 암호를 생성한다. 그것들은 내재적 공간에서도 초월성을 유지하고, 서구 의식에 다스릴 수 없는 슬픔과 열렬한 희망 양자를 모두 주입했다. 이 두 시조의 유사점과 대조점은 종교적 주석, 도덕적·철학적 해석뿐 아니라, 시적 장르들 및 연극 기술 연구도 이끌어냈다.
나는 천재성의 주요한 능력 하나는 신화를 만들고 우화를 고안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이 능력은 아주 희귀하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보다는 카프카, 모차르트보다는 바그너의 특징이다. 동굴의 신화 같은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신화, 겨자씨나 돌아온 탕아 같은 예수의 비유는 공통점이 있다. 끝없이 다양한 해석과 가능성을 촉발하는 열린 구조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균형을 흔든다. 우리가 파악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그것들은 우리의 부연과 이해를 벗어난다
괴테가 학계를 경멸한 것은 유명하다. “행동할 수 있는 자는 행동한다. 그럴 수 없는 자는 가르친다.” 현대의 익살꾼들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가르칠 수 없는 자는 학교에서 가르친다.” 괴테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비교해부학, 철학적 미학, 빛의 이론, 고화폐학, 국가 경영까지?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는가? 괴테에 비한다면, 칸트의 가치 있지만 무미건조한 문장이 무엇이겠는가?
괴테의 경력에는 흥미로운 각주가 있다. 그는 자신의 ‘색채 이론Farbenlehre’이 악의적으로 무시당한다고 분개했다. 그것은 뉴턴 광학에 대한 비판으로, 매혹적이지만 잘못된 이론이다. 어떤 젊은 철학자가 그를 돕겠다고 했다. 괴테의 이론을 옹호하고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괴테는 제자의 총명함과 헌신 의지에 감동했다. 그래서 그에게 열두 차례의 개인 교습?독일 학계의 용어로는 privatissime?을 해주었다. 하지만 제자는 차츰 의심이 들었다. 그는 프리즘에 대한 괴테의 설명을 재검토하다가 오류를 발견했고, 결국 그 이론을 반박했다. 괴테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1870-71년의 보불전쟁의 굴욕 이후, 프랑스는 ‘진지함’을 열망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이 우세했던 것은 독일의 병기가 아니라 과학과 인문 양 분야에서 모두 우월했던 프로이센의 교육 제도와 사상이었다. 독일식 ‘김나지움Gymnasium’, 훔볼트가 개혁한 대학, 연구 수준과 학술 출판으로 육성한 지식의 틀이 프랑스 제2제정기의 지적, 학술적 관행의 천박함과 아마추어적 비체계성을 폭로했다. 군사적 우위는 헤겔이 구체화한 엄밀한 분석 습관의 논리적 결과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교육 이론은 자유 의지라는 수수께끼와 관련된다. 그것은 신의 명령, 심지어 신의 사전 지식도 인간의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명제와 씨름해야 한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버리고, 재평가하고, 하나의 가설로만 생각할 자유가 있다. 수많은 플라톤주의자는 『국가론』과 그 전투적인 우생학을 자조 섞인 유토피아로 읽었다. 말로의 『포스터스 박사』에는 미안하지만, 모든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체사레 보르자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영향을 받아도 책임은 결국 개인의 영혼에 있다. 사고하는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그의 고별 수업은 1933년 7월 1일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그날 강의실에 고위 공직자가 너무 많이 와서 알랭은 이틀 후에 다시 가서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그때 지난번 수업의 당혹스러운 허식을 암시하면서, “정의와 자선에 대한 우리 수업의 상황이 한심했다”고 말했다. 작별의 말은 없었다. 위엄은 과묵하다.
프로이트의 신뢰와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질투가 폭발했다. 정신분석학이 억압된 호모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하는 ‘전이’가 만연했다. 융, 랑크, 아들러는 각자 스승에게 다소간 격렬하게 반대하며 나가서 독자적 학파를 세웠다. 빌헬름 라이히가 가장 맹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슬퍼했지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오이디푸스 독법의 핵심에는 아버지 살해가 있었다. 문명은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일어났다.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모세와 동일시하고 정신분석이 오랜 세월 사막을 지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융이 아론이 되고 아들러가 ‘유다’가 될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불랑제의 학생이 아니었던 사람은 그녀의 가르침의 매력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 소통과 결합하지 않으면 미적인 것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래드클리프 합창단원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최선 이상을 행하라!” “나의 최선을 자네의 최선과 바꿀 수 있을까?” 같은 말을 했다. 또 1945년에는 “교사는 흙 속의 부식토일 뿐이다. 많이 가르칠수록 생명과 그 긍정적 결과에 더 많이 접촉한다. 모든 걸 고려해보면 나는 때로 교사가 진짜 학생이자 수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십 년 후에는, “가르칠 때 나는 씨를 뿌린다. 그리고 누가 그걸 잡는지 본다... 그걸 잡는 사람, 그걸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생존할 것이다. 나머지에는 관심 없다.” 그리고 [음악 저널Musical Journal] 1970년 5월호에서는 “어린이는 최대한 신중하게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적 정의에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적 정의는 사소한 정의다.”(플라톤과 괴테가 얼마나 동의했을까)
유대교는 교육에 대해 비타협적이다. 교육은 유대교 일신론에 내재해 있다. 아브라함 이후 신과 유대인의 끝없는 대화는 흠모하고, 반항하고, 복종하고, 외면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하는’ 민족을 통해 사제 관계의 모든 면을 보여주었다. 모세가 전달한 토라, 다윗의 영감으로 쓴 시편, 각종 예언서와 잠언이 일상적 가르침의 실러부스와 매뉴얼을 이룬다. 유대인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데examined’ 그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성찰하는 인생examined life’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대인은 평생토록 교육받는다. 이 교육 관계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대화의 폭이다. 그것은 열광적 찬양으로부터 쓰라린 아이러니에 대한 복종, 욥의 도덕적 항변까지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서기 65년 무렵, 그것은 이미 창시된 지 5세기가 지나서 스승과 현자의 전설로 가득했다. 도교와 유교는 경쟁 관계이자 상호 수태 관계였다. 수 세대가 산스크리트 문헌의 번역에 힘을 쏟았다. 527년에 광둥을 찾아온 보리달마는 권위 있는 현자의 모든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그 모티프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스승이 제자들과 작별하고 산중으로 떠난 뒤 나막신 한 짝만 발견된다. 엠페도클레스의 그림자. 경전적 문서는 변함없는 존경과 주해의 대상이지만, 깨우침의 핵심에 있는 것은 말과 개념을 초월하는, 그래서 많은 수가 비전과 비밀의 길을 가는, 구술 전달이다.
과학 역사에서도 개별적 천재성은 문학과 예술의 천재성만큼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중요성은 훨씬 떨어진다. 단테가 없다면 『신곡』은 없고, 바흐가 없다면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없었다. 슈베르트의 요절은 실현되지 않은 감성의 공간을 남겼다. 수학과 과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대수 논문에 개인적 스타일이 담길 수는 있지만, 페르마의 정리를 풀거나 리만 가설을 도출하는 것은 다른 대수학자도 가능했다. 다윈은 진화와 자연 선택 이론의 문턱에 다다른 여러 동물학, 지질학 연구자들 중 가장 철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승 직분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질투, 허영, 오류, 배신이 불가피하게 끼어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갱신되는 희망, 불완전한 경이는 우리를 인간의 ‘위엄dignitas’을 향해 돌려세워서, 더 나은 자신에게 귀환시킨다. 아무리 편리한 기계적 수단도, 아무리 의기양양한 물질주의도 우리가 스승을 이해했을 때 경험하는 여명을 없앨 수는 없다. 그 기쁨이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낭비되는 일은 분노를 일으킨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