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ees.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튀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 p.13, 「헤테로토피아」 중에서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결국 나는 우리가 이 장소에 맞서고, 이 장소를 잊게 만들기 위해 그 모든 유토피아들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의 매력, 아름다움, 경이로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유토피아, 그것은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이다. 한데 그것은 내가 몸 없는 몸을 갖게 될 장소인 것이다. 아름답고, 맑고, 투명하고, 빛나고, 민첩하고, 엄청난 힘을 지니고, 무한히 지속되고, 섬세하고, 눈에 띄지 않고, 보호되고, 언제나 아름답게 되는 몸. 원초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 p.30, 「유토피아적인 몸」 중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겨진 그의 눈 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제야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 p.40, 「유토피아적인 몸」 중에서
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 p.51, 「다른 공간들」 중에서
그런데 오늘날 이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사회적인 규범의 요구나 평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개인들이 들어간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그러한 장소에 속한다. 아마 여기에 양로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양로원은 위기의 헤테로토피아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의 경계에 있다. 필경 그것은 위기이지만, 여가활동이 규칙이 되고 무위가 일탈이 된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일종의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4, 「다른 공간들」 중에서
한데 17세기에, 그리고 17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박물관과 도서관은 개개인의 선택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반면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일종의 보편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발상, 한 장소 안에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식, 모든 취향을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시간 그 바깥에 있으면서 부식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담아둘 장소를 구성하려는 발상, 이처럼 고정된 어떤 장소에 시간을 영원하고 무한하게 집적하려는 기획,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근대성에 속하는 것이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19세기 서양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이다.
--- p.58, 「다른 공간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