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가르침은 통장에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몰라서 평생 한 푼도 꺼내 쓰지 못하는 중생의 가난한 삶을 바꾸라고 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바꾸는가? 자신이 부처임을 확고히 믿는 순간 오래전부터 부처였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고한 믿음은 단순히 믿음의 강도나 세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완성을 말한다.
--- 본문 중에서
화엄에서 일즉다 다즉일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존재가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닌 텅 비어 있음[空]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팔상·독성·나한전의 벽화가 화엄의 원융철학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데에는 건축물의 독특한 구조도 빠트릴 수 없다. 팔상전, 나한전, 독성전이 개별적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건축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또한 화엄의 철학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불가에서는 조고각하(照顧脚下)란 말을 자주 쓴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 자신의 발밑부터 살펴보라는 말이다. 이는 잘못된 것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타인의 행위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져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천은사에 갈 때마다 벽화를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가 말한 ‘저들’을 ‘내’가 아닌 ‘저들’이라고 부를 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 본문 중에서
현재 『서유기』 관련 벽화가 남아 있는 사찰은 통도사, 불국사, 하동 쌍계사, 대구 용연사로 그림의 수준과 규모로 볼 때 통도사 용화전의 벽화가 가장 우뚝하다. 통도사 용화전 동·서 벽면에는 7점의 『서유기』 벽화가 남아 있는데, 각 벽화마다 그 내용을 알려주는 화제(?題)가 달려 있다. 오랫동안 비밀에 싸여있던 벽화가 『서유기』의 내용을 그린 것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 본문 중에서
보광사의 연화화생도가 무엇보다 인상적인 이유는 벽화 아래쪽에 덩그러니 놓인 빈 연화대 때문이다. 세월이 빚어낸 우연이겠지만 인물만 지워진 텅 빈 연화대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텅 빈 연화대에서 무엇을 보느냐는 근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근기는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이고, 중근기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상근기라면 바로 그 자리가 부처로서 내 자리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당신은 어떤 근기인가?
--- 본문 중에서
언어무용론과 언어도구론이라는 이분법적 운동장에서 벗어나 불교를 새롭게 읽으려는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우선 『능가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이 왜 달과 손가락을 ‘함께’ 묶어서 비유해왔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이는 달이 손가락 너머에 홀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늘 손가락과 ‘함께’ 있음을 깨닫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손가락이 없으면 달도 없고, 달이 없으면 손가락도 없다.
--- 본문 중에서
오늘도 통도사를 찾은 사람들은 금강계단 주변을 서성이며 붓다가 전하는 진리를 엿보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모른다. 그 진리가 진리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믿음이나 열망이 아니라 컴컴한 영산전 내부에서 조용히 바래가는 한 점의 벽화라는 사실을.
--- 본문 중에서
문수는 지혜이고 보현은 실천을 상징한다는 단편적 지식 따위로 삶은 바뀌지 않는다. 문수와 보현이 둘이 아님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지혜와 자비라는 뜬구름 같은 말들이 내 삶에 사무치는 가르침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본문 중에서
‘네가 날 죽이려 드니 나도 죽이겠다’라는 세간의 합리는 불교의 가르침도 아니고, 세상을 이끌 혜안도 아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철리야말로 석가모니가 깨우친 연기법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불자이자, 유자(儒子)이고, 더불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배타성의 좁은 우물에 갇혀 돈 꾸러미에 놀아나는 두꺼비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는 보살이 될 것인지 마곡사 하마선인도는 묻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달마는 없다. 모든 경전을 폐하는 선법을 전하고, 독약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런 달마는 없다. 그림을 걸어놓으면 복을 주고, 재앙을 소멸케 하는 그런 달마는 없다.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모른다[不識]”라고 답하는 달마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선종의 초조로서 달마가 지니는 유일한 의미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불법의 큰 뜻을 물으러 온 승려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말한 조주선사처럼, 스승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때 제자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역설을 이교취리도는 신발 한 짝을 통해 담담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해남 미황사의 다양한 부처를 보면서 천불의 가피(加被)가 중생들에게 넘쳐나는 세상, 다시 말해 많은 부처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 자문하게 된다. 경전에서 붓다를 큰 의사에 비유하는 것은 중생이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픈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