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수정하면서 가장 낯설었던 경험은 여성을 별다른 의구심 없이 ‘그녀’로 지칭하던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얼핏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여성을 ‘그녀’라고 부르는 것은 무용수들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뛰고 돌고 날아오르는 무대 위에서도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남성과는 다른 무엇으로 규정짓는 행위(그렇다. 이는 마땅히 ‘개념’이 아니라 ‘행위’라 칭해야 한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고가 이 지점에 이르자 직관적으로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이라는 제목이 도출되었다. 이렇게 도출된 제목은 필연적으로 앞서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무엇에 대한 역사인가? 나는 감히 무대 위에서 표현된 여성의 모습에 대한 역사라고 말하겠다.
--- p.11, 서문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중에서
무용은 여성 예술가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장르지만 움직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몸의 전시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몸의 대상화를 통한 여성의 타자화가 가장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
발레는 이상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여성을 타자화하는 대표적인 장르다. 발레 작품의 여성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하고, 자신이 사랑을 배신한 대가가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야 회한에 찬 눈물을 흘리는 남성 주인공들은 여성의 용서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
--- pp.20~21, part 1 「사랑의 구원자로서 여성의 승리, 국립발레단 〈지젤〉 vs.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중에서
성직자의 성추행으로 인해 자매들과 함께 백조로 변하는 벌을 받아 목소리를 잃은 피놀라는 성폭력 피해자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 아닌 주인공 지미에게 구원의 여신이 되는 부수적인 역할에 머문다. 안무가도, 주인공도, 피놀라를 성추행한 목사도 그녀의 피해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결과적으로 피놀라는 지미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 (그 희망조차 지미의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백조가 되어야 했으며 백조가 되기 위해 성직자에게 성추행을 당해야 했다. 피놀라가 극중에서 자신의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p.56, part 1 「고전과 실제 사건이 만났을 때, 백수청년과 구원자 백조 , 마이클 키간-돌란 〈백조의 호수〉」 중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호세의 심리에 천착하는 창작자들은 어쩐 일인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카르멘의 심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창작자들은 한 목소리로 호세를 유혹하고 배신했기에 카르멘이 살해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 일쑤인데, 잉에르 역시 이러한 창작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연일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진 이별범죄가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카르멘을 죽인 호세를 안타까워하며 이 작품을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때다. 우리는 혹시 살인에 이를 만큼의 무서운 집착을 ‘사랑’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p.79~80, part 2 「이별살인 가해자에 대한 끝없는 연민,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 중에서
이 징벌의 현장은 시각적으로는 성반전으로 형벌을 받는 남성의 모습을 재현하면서도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남성이 섹스 시 착용하는 콘돔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남성을 징벌자의 위치에 두고 있는 한편, 임신을 막아주고 그로 인해 더욱 자유로운 섹스를 가능케 해주는 콘돔이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두 겹의 의미를 지닌다.
--- p.105, part 2 「죄 없는 자들이여,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댄스프로젝트 Tan Tanta Dan 〈Woman , 돌을, 던지다〉」 중에서
소년은 소녀를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소녀는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우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에서 남아는 원래 그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그래도 되는’ 존재이고 여아는 짓궂은 장난의 대상이자 그 장난에 스스로 반격하지 못하는, 「그럴 힘이 없는’ 존재로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 pp.135~136, part 3 「어린이들에게 성차별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본, 크리스마스 발레 〈호두까기인형〉」 중에서
창작자들은 왜 불행한 여성을 좋아하는가. 혹시 여성의 불행한 인생을 창작물로 재구성해 그가 고통받는 과정을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고통받는 과정을 왜 보고 싶은가. 세상이 짓밟은 그를 불쌍히 여겨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애가 작용한 건 아닐까. 그를 구원해줌으로써 창작물 안에서나마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기억해야 할 것은, 불행한 여자는 내 창작에 영감을 주기 위해 그렇듯 불행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 pp.167~168, part 4 「창작자들은 왜 불행한 여자를 좋아하는가, 국립발레단 〈마타하리〉」 중에서
이 같은 현실의 암담함 속에서 다시 무대에 올려진 〈라스트 엑시트〉는 안무가의 의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시대의 청년여성 노동자들이 더욱 감정이입하며 공명할 수 있는 작품이 됐다. 언제나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던 청년여성들의 노동문제가 공연이 올려지던 무대에서만큼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스트 엑시트〉는 이러한 청년여성들의 노동문제를 고발하는 동시에 무대에 올라간 무용수들 대부분이 작품 속 오데트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점에서 당사자성을 획득하고 있다.
--- pp.209~210, part 5 「자본 권력에 묶인 노동자 백조, 와이즈발레단 〈라스트 엑시트〉」 중에서
중반부에서 드라마가 헐거워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시민군의 투쟁을 그린 바리케이트 장면과 장발장에 의해 목숨을 구한 자베르의 자살,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결혼, 장발장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작품은 다시 처음의 호흡을 되찾는다. 특히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여성 시민군에게 깃발을 쥐어주며 혁명의 주체로 그려낸 것은 남성으로 대표되어온 혁명의 얼굴을 여성으로 바꾼 탁월한 연출이었다.
--- p.223, part 5 「바리케이트를 지킨 여성 혁명군들, 댄스시어터 샤하르 〈레 미제라블〉」 중에서
〈전사의 땅〉이라는 제목의 숨겨진 힘을 드러내는 것은 이 같은 폭력이 휘몰아치고 난 다음이다. 인간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고자 했던(여기서 춤은 말이나 행동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여성(권이은정)이 언어폭력의 희생자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해녀를 연상케 하는 또 다른 여성(천샘)이 등장해 그
를 쓰러트린 폭력을 정화시킨다. (인터넷에서는 설리의 사망 후 여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포털 연관검색어 정화 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정화는 대개 한국무용에서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수순이지만 천샘은 정화 이후 싸우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 p.242, part 5 「폭력의 피해자에서 싸우는 전사로, 서경선 〈단단한 고요〉 & 천샘 〈전사의 땅〉」 중에서
내내 뒷모습만 보여주던 무용수들이 마침내 뒤로 돌아 객석을 바라보는 순간, 이들은 앞치마 형태의 의상을 풀어 헤치며 가리고 있던 상체를 드러내는데, 이 장면은 각선미와 엉덩이의 곡선을 강조하며 소위 ‘여성성’을 파편화해 보여주는 케이팝 안무와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마네가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여성도 시선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웅변한 지 백오십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성은 시선의 대상으로, 대상화되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규정되고 있는 사회적 시선에 다시금 반기를 든 것이다.
--- p.278, part 6 「가장 뜨거운 질문, 여성이란 무엇인가, 허성임프로젝트 〈넛크러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