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생애는 이처럼 제멋대로 펼쳐진 종말론적 풍경(짐승의 숫자에 관한 암호문 같은 시, 미터법은 사탄의 음모라는 주장, 단일 세계 정부가 우리 몸에 칩을 심는 최후의 날에 대한 공포 등)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서 전승의 조각들과 파편들은 거대한 본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종말론적 상상에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이 전기는 곧 조각난 삶의 이야기, 분리되고 쪼개지고 흩어졌다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매혹적인 방식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기이한 방식으로 다시 합쳐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이야기다.
--- p.18
수많은 비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시록이 살아남았다는 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계시록을 읽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계시록 본문을 읽어 본 적이 있든 없든, 많은 사람에게 계시록의 여러 장면, 등장인물, 심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일곱 개의 봉인, 네 명의 기사, 붉은 용, 태양을 둘러 걸친 여자, 대천사 미카엘, 분노의 포도, 짐승의 낙인, 창녀 바빌론, 재림, 천 년의 통치, 죽은 이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생명책, 새 예루살렘 같은 것들 말이다. 좋든 나쁘든 계시록의 도발적인 묘사들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예술가, 작가, 지도자, 사회 운동의 종말론적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서구인들의 경우 계시록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 혹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 p.27
파트모스의 요한은 여러 상상을 했지만 무시무시하고 악마 같은 제국 세력의 절정,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추종자들에게 궁극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로마가 언젠가 그리스도교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그리스도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 p.89
계시록은 교회의 이 새로운 상황과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로마 제국을 향한 격렬한 증오와 제국의 몰락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이제 막 어엿한 권위 있는 문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이 문헌은 어떻게 로마 그리스도교 정경에 속하게 되었을까? ‘창녀 바빌론’은 불길에 휩싸이는 대신 교회와 결혼했다. 이와 맞물려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라고 신자들에게 장담하던 계시록의 긴박감은 한두 세기 이전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교회는 이제 국가의 부와 권력이라는 안락함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계시록을 어떻게 취급했을까?
한 가지 방법은 계시록과 계시록에 담긴 잔혹한 반로마적 환상들을 내버리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경전으로서 계시록의 지위는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다. 이레네우스 같은 이들은 계시록을 받아들였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이들은 계시록이 무의미하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헌이라고 말했다. 325년 에우세비우스가 이 문헌을 누군가는 수용하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논쟁이 있는” 책으로 분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에게 세례를 베푼 시기까지도 계시록의 지위에 대한 의심은 해소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무시무시한 적이 아닌 옹호자로 떠오른 시기에 계시록을 단호하게 추방할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또 다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적인 바빌론을 로마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계시록에 나오는 하느님의 반대자, 악의 세력은 로마 제국 자체는 아닐 수도 있다.
--- p.93
힐데가르트는 계시록이 새로운 다중매체의 차원에서 살아남고 번성하는 데 기여했다. 물론 힐데가르트의 저작 이전에도 계시록을 채색한 필사본은 여럿 있었으며, 그중 11세기에 만들어진 『밤베르크 묵시록』Bamberg Apocalypse은 계시록 라틴어 본문 전체와 함께 57개의 채색 삽화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평생에 걸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계시록과 다른 여러 성서 전승을 나름대로 흡수하여, 그 어떤 성서 삽화도 도달하지 못한 방식으로 단어와 심상이 상호 작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말론적 상상을 빚어냈다.
--- p.141
조아키노의 상상에서 성서 역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인 역사다. 성서 역사는 창조부터 완성까지 시간에 따라 나아가는 (통시적인) 세계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선형의 이야기다. 동시에, 성서 역사는 지리 정보 시스템처럼 여러 겹이 있는 지도 같은 것이어서, 이 지도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반영하는 역사의 공간적인(공시적인) 지형을 밝히고 해독하는 도구로 쓰인다.
창조에 담긴 하느님의 뜻 전체는 일상의 경험이나 구약 및 신약의 세세한 구절들과 같이 빽빽한 숲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놓치기 쉽다. 하지만 대우주이자 바깥쪽 바퀴인 보편적 역사의 내부에 있는 소우주인 요한 계시록은 하느님의 뜻 전체를 드러내 준다. 계시록은 보편적 역사의 색인이자 해석의 열쇠다.
--- p.150
계시록은 단 한 번도 인쇄된 책이라는 틀 안에 갇힌 적이 없다. 물론 여러 번 등장하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우리가 듣거나 읽는) 일련의 단어들이 조리 있게 배열되고 느슨한 서사 구조를 이루어 마침내 최후의 전투, 최후의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과 거룩한 새 도성의 도래에 관한 전망으로 마무리되는, 계시록이라 불리는 문헌 전승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문헌 전승은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큰 소리로 낭독되었고 그 후에는 두루마리에 손으로 기록되었다가 이내 코덱스로, 채색 필사본으로, 인쇄본으로, 오디오북과 소프트웨어와 모바일 웹 프로그램으로 변모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생명력을 유지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이 전기를 통해 살펴보았듯 계시록의 단어들은 계속해서 서로 분리되어 새로운 문헌과 구전의 맥락으로 파고들었고, 끊임없이 다른 심상, 음악, 공간, 사물과 결합했다.
계시록은 책이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본문도 아니며, 계속 확장하고 수축하는 다중매체 집합체다. 계시록은 우리의 일부다. 느슨하게 묶인 계시록의 심상과 구절들, 조각과 파편들은 사람들의 상상을 거쳐 수축하고 확장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운 계시록, 새로운 역사 도식, 새로운 지정학적 해독, 낯선 신들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 공현epiphany을 위한 새로운 무대, 휴거라는 새로운 환상, 홀로 남겨진다는 새로운 악몽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 p.269~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