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테크네를 지니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서 테크네를 얻는가? 테크네라는 낱말을 『형이상학』 첫 부분에 나오는 좁은 뜻으로 이해한다면, 테크네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것을 추출하여 방법론적으로 설명하고 제시할 수 있는 철학자뿐이다. 작품으로 평가받는 시인에 대해서는, 그 재능의 토대가 되는 것이 정말 테크네에 대한 지식인지는 전혀 말할 수가 없다. 습성이나 타고난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분명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호메로스는 예외가 될 수 있다. 24장에는 적어도 이를 암시하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호메로스는 “시인들 가운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알았던 유일한 시인”(60 a 6)이다. 또한 “무엇보다도(malista) 다른 시인들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쳤던”(60 a 18 이하) 사람이기도 했다. 호메로스는 바로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규범을 가르쳤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을 의식하고 있었던 시인, 그 기술을 공식화해서 전할 수 있었던 시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시를 짓는 일(poiesis)의 아버지에 그치지 않고 작시술(poietike tekhne)의 아버지도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에게서 모델을 넘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는 보증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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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극이 관객에게 일깨우는 감정들을 “정화”하고 그처럼 고통이 아닌 쾌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비극이 그 자체로 정화된 대상들을 관객의 시선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현의 연금술 모델은 4장에서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48 b 10 이하). “실물로는 보기만 해도 고통스럽지만(auta luperos horomen) 그것을 아주 잘 다듬어 그린 그림을 볼 때는 쾌감을 느낀다(khairomen theorountes).” 고통(luperos, “고통”을 뜻하는 ‘lupe’에서 파생된 부사) 대신에 쾌감을 느끼는 것(khairein은 “쾌감”을 뜻하는 실사,‘hedone’에 상응하는 동사. 『니코마코스 윤리학』, 1154 b 26 및 다른 부분들을 참조할 것)은 형태를 정화하는 재현 작업을 통한 시선의 변형에 근거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혐오감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 사물 그 자체의 단순한 시각(horan)이, 이를 재현한 미메시스의 산물 앞에서는 지성의 작용(manthanein)으로, 그러니까 쾌감을 동반하는 시선(theorein)으로 바뀌는 것이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도 그와 비슷한 과정의 결과이다. 관객은 시인이 능숙하게 만들어 낸 형태들,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의 본질을 규정하는 그 형태들을 줄거리(muthos)에서 알아보게 되며, 그러한 줄거리를 접하게 된 관객 자신은 연민과 두려움을, 하지만 정제된 형태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때 관객을 사로잡고 우리가 미적이라고 규정하게 될 정화된 감정이 쾌감을 수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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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시인에 대한 정의는 『시학』을 해석하는 열쇠들 중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포이에시스와 미메시스라는 두 개념의 의미를 동시에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에 말한?9장 첫 부분만이 아니라 6장에서 8장까지 줄거리를 다루고 있는 장들 전체?모든 사실에 비추어(ek touton, 51 b 27) 1장에서 사용한 용어들을 다시 언급하며 그 뜻을 명확하게 한다. 시인이란 “운율을 만들어 내는 사람”(poieten ton metron)이라기보다는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poieten ton muthon)이다. 왜냐하면 6장(50 a 4)에서 이미 보았듯이, 행동을 재현한다는 것(poietes kata ten mimesin, mimeitai de tas praxeis)은 사건들을 조직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며, 하나의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oiein’이라는 동사에 부여된 주된 의미, 기술상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시 작품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구성하는 것”이며 그 재료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일어난 것과 일어날 수도 있는 것 사이의 구분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있음직함과 필연성에 따라 행동을 배열하고 줄거리를 구성한다면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 오는 이야기에 충실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중요한 것은 줄거리, 즉 뮈토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시인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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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연설가나 배우가 구사하는 표현이야말로 정념을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19장(56 b 8 이하)을 보게 되면 표현의 문채(skhemata lexeos)는 시학과는 무관하며 배우의 기술, 즉 해석(hupokritike)의 소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7장에서 ‘skhemata’를 통해서 작품에 완성된 형태를 부여하라고 시인에게 권유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자기모순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체적인 기술들과 배우가 작품 해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음성 및 동작의 기술들 사이에는 텍스트가, 시인에게는 하나의 목적이자 그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인 텍스트가 존재한다. 시인은 정념의 움직임을 “가장 진실하게”?통사 및 리듬과 관련되어?재현할 형식들을 언어가 제공하는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여 텍스트 속에 담아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창작에 도움을 주는 ‘skhemata’(『시학』 55a 29)와 해석의 저장고에 들어 있는 ‘skhemata’(『수사학』 2권 1386 a 32) 사이에서 시인이 자기가 창조하는 “문채들”이 깃들게 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적인 지점이다. 따라서 표현을 통해 작품에 완성된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은 탁월하게 시적인 과제로서, 표현 형식과 “문채들”을 텍스트 고유의 코드에 따라 새겨 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채들을 낳게 한 감정의 움직임의 순서를 바꾸게 되면, 이번에는 거꾸로 이를 다시 동작과 음성으로 적절하게 옮길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배우의 해석 기능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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