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혁명을 겪었다. 이 혁명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가정을 뒤엎었고, 물질적 재화, 성적 쾌락, 가족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본질적으로 사적이라는 가정을 뒤엎었다. 경제학, 사회학, 신경 과학 그리고 심리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최신 연구는 인간이 타인의 욕구와 고통에 조율되어 있는 존재, 연민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 p.29~30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마침내 안정을 되찾을 수 있고, 추락하고 있는 우리 주변 사람들까지도 받아낼 수 있는 어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한한 실존적 불안 위로 추락하고 있는 와중에도 안정을 되찾는 방법과, 닻을 내리고 정박하지 못한다는 느낌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타인을 돕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안식처는 전혀 땅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땅은 절대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얻는 자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함께 무한한 삶의 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집착은 없지만 친밀하게 말이다.
--- p.98
시한부 환자를 돌보는 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해 온 많은 의료인들은 환자의 수명을 연장해야 하는 부담이 그것의 혜택보다 클 때 직면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떤 이들은 생존 기간이 며칠뿐인 환자에게 심폐소생술(고통스럽고 흔히 소용없는 절차)을 실시해 달라고 요구받는다. 한 의료인은 단지 의료 기관에 수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혈액 제제가 필요한 환자에게 그것을 공급하지 못했던 일화를 내게 들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처치가 실제로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두고 그들의 팀과 논쟁을 벌였다고 말했고, 병원 정책이나 환자의 기대 때문에 최선의 방법을 추구할 수 없었다고도 했다. 일부는 소진으로 인해 도덕적 무관심에 빠져서 누군가를 돌볼 능력을 아예 잃어버렸다.
--- p.179
라일라가 자신의 할머니는 노예였다고 말해 주었을 때, 나는 놀라서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노예 제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정말 나쁜 일임을 알았다. 여전히 우리 집안에서는 노예 제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골프, 초등학생 걸스카우트, 사업 거래 등에 관해서는 들었다.
라일라와 나는 두 개의 다른 우주에 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우주는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내 가족이 점령하고 있는 우주는 라일라의 우주를 착취했고, ‘타자화’로 유지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라일라는 자신의 인간애를 통해 인종 차별의 가혹한 현실로부터 우리 가족을 보호하던 백인의 특권에 대해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도덕적 무관심이 어떻게 우리 세상을 계속 타락시키는지에 대한 깊어가는 인식과 함께 말이다.
--- p.196
물질적 빈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마음 상태인 ‘가난한 마음’이 감사를 주고받는 우리의 능력을 차단한다. 가난한 마음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부족한 것에 초점을 둔다. 즉,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거나, 사랑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며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무시한다. 의식적으로 감사를 실천하는 것은 마음과 진정성을 약화시키는 빈곤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하루의 끝에서 느낄 수도 있는 낙담에 대처하기 위해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천천히 회상한다. 때론 방금 바라본 석양을 회상하고,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한 제자의 이메일, 또는 그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제자의 눈빛, 또는 내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준 어려움의 순간을 회상한다. 하루의 끝에 이 순간들을 모으는 것은 내게 삶과 관계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는 감사함의 실천이다. 이것은 일종의 축복을 세는 것과도 같다.
--- p.210~211
일본에는 ‘황금 수리’를 의미하는 ‘킨츠쿠로이’라는 말이 있다. 킨츠쿠로이는 깨진 도자기를 수리할 때 금가루나 백금가루를 옻과 섞어서 수리하는 기술이다. 이렇게 하면 그 수리에는 파손의 역사가 반영된다. ‘수리된’ 것은 삶의 연약함과 불완전성을 반영한다. 또한 삶의 아름다움과 힘도 반영한다. 그것은 완전함으로, 진정성으로 되돌아간다.
--- p.213
교도소 안에서 일하면서 내가 배운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보다 더 세다고 느껴서 폭군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은 자신이 더 약하다고 느끼고, 종종 아직은 의식하지 못한 수치심으로 고통받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취약함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자기 보호의 방법이 된다.
--- p.251
일이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일중독이 직장 내 높은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동료들은 지난밤 사무실에서 얼마나 늦게까지 머물렀는지, 또는 주말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했는지 서로 경쟁하는 경우가 많다. 일중독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많은 직업과 서비스에서 사실상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때문에 특히 서서히 퍼져 나가는 중독의 한 형태다. 즉, 어쨌든 일중독은 생산적이고, 일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일과 분주함에 대한 중독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도 원칙이 되고, 일종의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영성은 거의 결여된 종교다.
--- p.291
일이 우리의 삶과 정신을 장악할 때, 우리는 아귀(餓鬼)처럼 될 수 있다. 아귀는 전통 불교에서 갈망과 중독의 쾌락적 쳇바퀴를 도는 사람의 전형(典型)이다. 아귀는 비쩍 마른 팔다리, 실처럼 가는 목, 불거져 나온 배, 너무도 작은 입과 절대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을 가진 걸귀 들린 중생을 지칭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귀가 무엇이든 입에 넣기만 하면 다 독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일중독은 아귀의 불행한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업무 시간과 끊임없는 활동을 우리의 작은 입속으로 계속 떠밀어 넣어, 소진이라는 유독한 화학물질로 우리 배를 불룩 튀어나오게 하는 것과도 같다.
--- p.293
매년 나는 일본을 방문하여 의료인들에게 연민 수행을 가르친다. 전형적으로 매우 부지런한 의사와 간호사들로 방이 가득 찬다. 그들은 항상 비상 대기 중이고, 주당 최소 60시간을 일하지만, 그래도 환자나 일하는 기관을 위해 충분히 일한다고는 절대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의료인들은 한국과 중국의 의료인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내적?외적 기대에 직면해 있다. 이 세 나라 모두에서 일어나는 과로로 인한 사망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p.296
컬럼비아대학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스를 다루기 위해 선(禪) 수행을 시작했고, 명상 수행을 사회 활동과 결합하기를 원했다. 모든 선 수행자들은 차례대로 주방 일을 배정받는다. 처음 선원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근 자르기의 요점은 카이 제곱 검정을 초고속으로 하듯 빠르게 효과적으로 해치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점차 이것이 정확한 요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의 관점에서 당근 자르기는 그저 당근을 자르는 것이다. 수천 개의 당근을 자르고 난 후, 나는 ‘그냥 당근을 자를 뿐’을 수행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 p.301
우리는 자신에게 멈추고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단지 애도하거나 치유할 시간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다. 목표 없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고, 우리 중 다수가 목표 없이 존재하며 내려놓고 배회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극도로 목표 지향적인 사회에서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사실 시간의 ‘낭비’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에서 잘 알려진 어구로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깨달음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쫓아서 달리는 행위를 멈추라는 권유다. 그래서 나는 놓아줄 것을 나 자신에게 권유한다. 그리고 내가 우파야 선방에 앉아서 놓아주든, 또는 나의 작은 집필 공간을 벗어나 내 암자 옆 목초지로 산책을 나가든, 이것은 잘 소비된 시간이 아니라 잘 주어진 시간이다. 시간을 ‘소비할’ 자원으로 볼 때, 우리는 목적 없음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놀라움, 자양분에 접근하기 어렵다.
--- p.308
연민을 경험하는 것은 또한 우울과 불안을 줄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연민은 작은 자아의 편협함을 넘어 우리의 지평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연구자인 엠마 세팔라 박사는 썼다. “우울과 불안은 자아에 초점을 맞춘 상태, 즉 ‘나’, ‘나의’, ‘나를’, ‘내 것’에 몰두한 상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자아에 초점을 맞춘 상태는 타인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전환된다.”
--- p.329
지장보살은 벼랑 끝을 걷는다. 보살이면서 승려이고, 남성이면서 여성인 지장보살은 지옥의 문을 석장으로 두드린다. 문이 열리면 그녀는 불타는 구덩이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그녀는 고통받고 고문받는 중생의 무리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미친 듯이 뛰어들어 그들을 구하는 대신 그녀는 팔을 넓게 벌리고 서 있다. 구제를 원하는 자들은 그녀가 펼친 법복의 소맷자락으로 뛰어든다.
지장보살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안전하고 호의적인 곳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설령 우리가 고통받을지라도 우리는 타인이나 자신에게 연민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보살은 쉬운 상황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차림과 단호함과 궁극적으로는 호기심과 두려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갈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죽음과 삶의 교차로에 서기 위해서는 지장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자유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 p.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