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괜찮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사이 진짜 나를 찾는 일에는 한없이 소홀해져 왔다. 그 괴리의 어딘가에서 머뭇거리다가 생의 한 시절이 저물었다. 뒤늦게나마 ‘길러진’ 내가 아닌 원래 그대로의 내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졌다. 몸집에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맞추려 낑낑거리기보다, 내 몸을 유심히 관찰하고 맞춤옷을 기워나가듯 살고 싶어졌다. (…) 진짜 나를 키운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되짚어보고 그 까닭을 좇아나가기로 했다. 조금 늦은 것도 같지만, 여태처럼 나에게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살아가기엔 나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앞으로 너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결코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더 나은 나를 위해서다.
--- 「마중」 중에서
마흔을 앞두고, 그동안 당연한 명제로 여겼던 ‘인맥 관리’를 이제는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 인간을 쌓거나 넓히는 대상으로 활용하고 싶지 않다. 그저 개별로의 인간 주체와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 한다. 잘나가려는 희박한 가능성보다는 또렷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시간을 집중하고 싶다. (…) 사람에겐 하루 일구고 밭을 갈 수 있는 약간의 땅만 필요하듯, 결국 내 삶을 이루는 사람들은 주변의 몇 명, 많아야 몇십 명 정도일 것이다. 명절마다 문자를 보내고 애써 식사 약속을 잡으며 아껴야 할 사람들, 그러니까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들」 중에서
“얼마큼 돈을 벌어야, 평생 편하게 먹고살 수 있을까?” 돈 없이는 못 살겠지만, 돈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생산하지 않고도 편하게 먹고살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정신은 노화되고 몸은 부패할 것 같다. 직장 생활 10년을 따라다닌 저 질문은 삶을 가장했지만, 결국 죽음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 「얼마큼 벌어야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 중에서
지금은 나 하나 고칠 건 없는지 제대로 돌아보고, 크게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살자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 길만 이탈하지 않기에도 생은 비좁고 아슬아슬하다.
--- 「꽃이 되고팠던 날들을 보내며」 중에서
잘나가는 팀원이면서 훗날 좋은 팀장이 될 수는 없는 걸까? 결국 사람은 책임이 많아지는 자리에 오를수록 능력치의 스위치를 바꿔서 켜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자기확신 대신 타인에 대한 신뢰를 키우고, 자기애보다는 공감 능력을, 자기긍정보다는 타인의 말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경쟁자들을 해치우던 날카로운 칼끝은 뭉뚝해지더라도 둥글고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를 키운, 자부심 돋는 능력치들이 팀원들을 해칠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 「잘나가던 팀원은 왜 나쁜 팀장이 될까」 중에서
지난날을 모아놓고 보니, 매해 뭘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푸념만 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보편 지향의 삶에 왜 그리 스스로를 욱여넣고 살아왔을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매 나이마다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그대로 살아내느라 정작 하고 싶은 걸 포기해버리는 패턴이 나이테처럼 폐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다면 그 나이대에만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도 겪어봤어야 더 삶답지 않았을까. 결국 매번 나를 멈추게 한 건 늦은 나이가 아니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었다.
--- 「돌아보면 매번 ‘너무 늦은 나이’였다」 중에서
나는 내 아이에게 보편의 삶부터 먼저 일러주고 싶다. 최소한 초등학교, 중학교라도 모두 뒤엉켜 같은 출발선에 서야 하며, 너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지하고 싶다. 그리고 다채로운 삶의 형태와 부대끼며 진짜 세상을 피부로 두루 학습하기를 바란다. 사람 사이에는 최대한 선을 긋지 않고 사는 게 좋겠다는, 살다 보면 누구도 ‘극혐’할 필요까진 없겠다는 진리가 자라나는 내 아이의 성장판에 스며들었으면 한다. 나의 옛 동네와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었듯이.
--- 「이런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