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안도감을 확산시키기 위한 신호였으며, 오랫동안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달된 소통 수단이었다는 가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나 지금이나 안전은 생명 유지의 절대 조건이다. 웃음은 물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에서 쉽게 터져 나온다. 그런데 안전함은 물리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샘솟아 번져 나가는 웃음은 억누르기 어렵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 그 에너지로 충전되는 관계는 행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 p.32
웃음이 새삼스러운 어젠다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웃음은 삶의 지표이자 삶을 빚어내는 원동력이다. 타인의 약점을 까발리면서 던지는 비웃음, 감정 노동자들이 모멸감을 느끼면서 짓는 억지웃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비관하는 냉소…… 이 모두는 병든 사회의 징후다. 무엇을 꿈꾸어야 할까. 모자라고 바보스러운 것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면서 환대하는 함박웃음, 실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재생의 힘을 북돋는 너털웃음, 깊은 애정과 신뢰가 깔려 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터지는 폭소…… --- p.53
그렇다면 좋은 유머 감각은 무엇일까. 우선 ‘감각’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사전적으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체 기관을 통하여 안팎의 자극을 느끼거나 알아차림’이며, 다른 하나는 ‘무엇에 대하여 민감하게 느끼거나 인식하고 반응하는 능력’이다. 한국말로 ‘센스가 있다’라고 할 때, 그것은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머 감각은 웃음거리를 감지하고 구사할 줄 아는 능력으로, 이성적인 추론이나 사유를 뛰어넘어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요구된다. 한편으로 상대방에 대한 호의와 배려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물과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냉철한 직관을 구사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유머가 영국에서 젠틀맨십의 중요한 요소로 권장되는 이유다. 여러 관점을 넘나드는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이고, 세련된 지성과 감성이 요구되는 것이 유머다. 절묘한 균형과 조화의 감각이 필요하다. --- pp.64~65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다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때가 많다. 생각이나 입장의 차이를 부질없는 대립으로 악화시키기 일쑤고, 아예 회피하고 외면하면서 유유상종의 폐쇄 회로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차이를 유머로 승화시킨다면 오히려 정서적인 접착제가 될 수 있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쾌한 긴장으로 즐기면서 대화의 멋을 빚어내는 것이 농담의 힘이 아닐까. 그 절묘함과 예리함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에서 우러나온다.
‘관찰’은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유머의 자원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다. 그것은 반짝이는 ‘통찰’로 연결되어 리얼리티에 대한 참신한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깔려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내면 작업이 필요하다. 거기에 비춰지는 상象들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타인과 세계를 드넓게 이해하는 눈이 뜨인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텅 빈 공간이 열리고, 몽글몽글 농담이 피어나 웃음으로 번져간다. --- p.116
유머가 동심을 빚어낸다. 동안童顔에 집착하지 말고 동심을 가꿔가자. 사심 없이 웃음을 터뜨릴 때, 우리는 잠시 어린아이가 된다. 문득 아이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면서 툭 던진 한마디가 까르르 폭소를 자아낼 때가 있다. ‘어? 나도 사람을 웃길 줄 아네?’ 하지만 놀랄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장난꾸러기의 동심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어린 시절에 모두 천부적인 유머리스트였음을 잊지 말자. 코미디란, 어른의 목소리로 아이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유머 감각은 키우는 것이 아니다. 회복하는 것이다. --- p.138
해학이 추잡醜雜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한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분별하고 듣는 사람들의 심경을 헤아리는 직관이 요구된다. 내 발언이나 행동이 뜻하지 않게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유머 감각을 가다듬어갈 수 있다. 〔……〕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유머의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 성적인 은유나 암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통쾌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익살의 세계를 넓혀가자. 남녀가 서로의 인격을 침해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언어 공간을 다양하게 창출하자. 『시경』에 ‘낙이불음樂而不淫’이라는 구절이 있다. “즐기되 음란하지 않다”라는 말로서, 그것은 금욕주의적인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성에 대한 이중성과 억압이 줄어들 때, 그리고 삶과 세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자라날 때, 마음의 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해학이 빚어질 것이다. --- pp.167~68
재미는커녕 비웃음이나 욕설이 나오는데 살아남기 위해 애써 웃음을 연기해야 한다면, 어느덧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동 반사로 웃음이 흘러나온다면, 겉과 속이 분리되고 단절되어 존재 불감증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굴하게 처신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직면하기가 괴롭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당한 권위주의에 문제의식을 갖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도 언젠가 끗발을 과시하리라는 오기로 흐르기 쉽다. 갑질에 시달리던 사람이 갑의 위치에 서면 똑같이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구조는 우리의 일그러진 욕망 안에 이미 잉태되어 있다. --- p.172
권력과 종교와 지식이 서로 맞물리면서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해온 역사 속에서 웃음의 위상은 왜소했다. 문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밀한 충동을 길들이는 과정이라고 볼 때, 웃음이 불길한 에너지로 여겨진 것은 일견 당연하다. 재기발랄한 지성이 발현하고 통제 불가능한 기운이 번져나가는 것은 권세자에게 위협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웃음에는 혁명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다. 재미는 세상을 바꿔내는 위력이 될 수 있다. --- p.208
유머는 새로운 프레임을 짜는 마음의 훈련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빠지기 쉬운 ‘인지의 왜곡,’ 즉 자신의 틀에 현상이나 경험을 끼워 맞추는 마음의 습관에서 잠시 거리를 두게 해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연습으로 귀결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유머는 기분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따라서 나치 독일에서 유머가 말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기분 나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유머는 관점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정신의 모험이다. 주어진 세계,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이면을 두루 살펴보는 지성의 운동이다. 그것은 곧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