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연은 운동화 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휴대폰은 운동복 주머니 속에 넣었다. 벽에 걸린 검은색 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켰다. 다연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골동품 같은 시계지만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늘 정확했다. 다연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물기 없이 깨끗하게 마른 싱크대, 싱싱한 튤립이 들어 있는 화병, 냉장고에 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메모,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는 앞치마, 그리고 공기 중에 은은하게 감도는 달짝지근한 냄새. 늘 보던 광경을 한 번 더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엄마와 외할머니가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을 몸 위로 한 겹 두른것 같다. 다연은 심호흡을 하고 집을 나섰다.
간밤에 소나기가 왔는지 보이는 것 전부가 촉촉한 물방울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다연은 한강공원을 향해 걸었다. 잠은 완전히 깼지만 몸 어딘가에는 아직 덜 깬 잠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잠실대교를 건너다가 난간을 붙잡고 한강을 내려다 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수면은 고요했다. 눈이 부시게 밝은 아침 햇살이 다리와 한강을 충만하게 비췄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한강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한강을 보고 있으면 물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었다. 가고 싶은 곳도 오라는 곳도 없지만, 강물에 빗물이 더해지는 걸 보면 마음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수도 없이 지나간 다리이고 매일 보는 한강인데 오늘은 평소와 느낌이 조금 다르 다. 어쩌면 줄지어 날아가는 참새마저도 어제 본 것과 같은 새들일지 모르는데.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중에서
“어른들은 왜 항상 넌 어리다, 앞날이 창창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만 되게 큰 혜택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자기들도 전부 어렸을 때가 있었으면서.” “어른이 되면 금방 잊어버려. 그리고 그때는 어리다는 게 귀찮고 짜증 났을 뿐이었다는 걸 다들 잊지.”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땀으로 흥건히 젖은 반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마지막 남은 핫바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예전보다 한가해진 건 좋지 않아? 자유시간이 많아졌잖아.” 그건 그렇다. 예전에는 새벽 운동, 등교 후 오전 훈련, 점심 먹고 오후 훈련, 하교하는 친구들의 등을 보며 저녁까지 달리고 나면 하루가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내킬 때마다 한강에 올뿐, 육상부 훈련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네?” 다연은 아저씨의 질문도 평가도 아닌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버럭 화를 냈을 것 같은데, 역시 좀 달라졌군. 예기치 못한 부상 때문에 좀 성숙해진 건가?” 다연은 아저씨를 째려보며 다시 벤치에 앉았다.
“달라졌느니 안 달라졌느니 할 만큼 우리가 친한 건 아닌 것같은데요?”
“으흠…….”
아저씨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신음을 내며 다연을 힐끔 거렸다.
“아저씨,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탄 기분 알아요? 내가 여기 갇혔는지 아무도 몰라서 구하러 올 것 같지 않은 기분.”
“난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넌 딱히 살려달라고 비상구조 버튼을 누르고 싶지도 않은 거지?”
“…….” 비슷하다. 비상구조 버튼을 누른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혼자 그러고 있음, 무섭지 않을까?”
“혼자는 아니고 우리 아빠랑 둘이 탄 것 같아요. 근데 아빠는 어른이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거예요.”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중에서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여름이면 인간들은 휴가 가기 전에 집에서 기르던 개를 버리잖아. 해마다 그런 식으로 가족에게 버림받는 개가 일 년에 7천 마리가 넘는다는 기사를 읽었어. 인간들은 여름휴가를 보낼 생각에 8월을 기다 리지만 개들한테는 죽음의 달이지, 뭐야.” 구구는 수다스럽다. 게다가 눈을 감고 들으면 정말로 비둘 기가 아니라 40대 아저씨랑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구구의 수다를 듣는 동안 요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일들이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날아갔다. 실제로 한강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쌀가루 같은 보슬보슬한 눈이 다연의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눈가루는 공룡처럼 잠들어 있는 한강 변 고층 건물들을 향해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신기해요.”
“그럴 만하지. 이런 통찰력을 가진 비둘기는 처음일 테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구구가 통통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뇨, 그건 맞아요. 처음이에요, 이런 비둘기는.” 금세 기분이 나아졌는지 구구가 어깨를 우쭐거렸다. 정말 다루기 쉬운 아저씨다.
“말하고 나니까 별일 아닌 것 같아서요. 엄마랑 아빠가 이혼한 것도, 엄마랑 외할머니랑 셋이 사는 것도.”
“다행이네. 어떤 문제는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법이거든.”
“그러게요.”
“그렇지만 말이야……”
구구는 이미 다 식은 핫팩을 부여잡고 말했다. “다음엔 꼭 핫바를 먹을 수 있게 해줬으면 해.” 다연은 그 애절함에 홀려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구구를 또 만나게 될까 생각했다. 설마하니 볼 때마다 여고생의 간식을 뺏어 먹는 식탐 많은 아저씨, 아니 비둘기를 또 만나게 될 줄은.
---「나의 ‘비둘기’ 아저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