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만큼 형제 순위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 지금은 꽤 느슨해졌지만,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는 제사 문화, 가부장 문화의 뿌리가 깊다. 특히 장남 장녀에게 요구되는 암묵적 책임감은 말할 수 없이 크고 무겁다. 그러다 보니 다들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기보다는 억압하는 것이 미덕이고, 그렇게 살아야 두루두루 편하다고 자신을 이해시키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중년의 나이를 맞이할 즈음이 되면 검열 선이 무너지며 그동안 눌려 왔던 감정들이 폭발해서 분출되는 위기를 경험한다. 상담 현장에서 상당히 많이 다뤄지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교무부장이 앓는 병의 원인이었던 실체는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가치와 규범이었고, 결국 그동안 자신이 끌어다 쌓아 놓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였다. 이젠 지긋지긋한 “넌 장남이잖아”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꺽꺽 목 놓아 울던 사십 대의 울음에서 나는 그림책 속 일곱 살의 사탕이를 보았다.
---「02 _ 칼 구스타프 융, 빛과 어둠, 자아 그리고 그림자」중에서
《짧은 귀 토끼》에서 잠시 엿본 것처럼 아들러는 열등감이 단순히 열등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월성을 추구하는 에너지가 된다고 했다. 즉, 인간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우월성(자기완성이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기는 열등성 때문에 걷고, 달리고, 읽는 것을 배운다. 인간은 열등감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존재이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배우려는 ‘의지’다. 아들러는 이 의지가 있어야 우월성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성숙한 어른이라고 보았다.
---「03 _ 알프레트 아들러, 열등감은 우월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에너지」중에서
게슈탈트 치료이론에서는 자의식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을 ‘점잖은 신사’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점잖게 가만히 있는다’는 의미로, 좋은 뜻이 아니다. 마치 자아비판처럼 나의 가치 판단이나 생각을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다. (중략)
내가 상처받을까 봐,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 아프더라도, 조금 상처받더라도 과감히 내 마음을 끄집어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심리학이고, 그중에서도 게슈탈트 치료이론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론을 안다고 삶이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론을 삶에 ‘적용’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실천’해야 작은 발걸음이라도, 느리게라도 전진할 수 있다.
---「05 _ 게슈탈트 심리학, 혹시 나는 점잖은 신사?」중에서
프랭클은 인간의 행동 동기가 목적 지향적, 의미 추구라고 보았다. 프랭클은 인간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맞닥뜨릴 때 그를 구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보았다. 현재가 아무리 힘들어도,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들어도,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라도, 목표로 하는 미래가 가치 있다면 인간은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이고 목적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의미를 찾는 의지’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라고 본 것으로, 이 말은 곧 삶의 의지가 사라지면 나의 존재, 실존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중략)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대표작 《유리 아이》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중략) 유리 아이는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휩쓸려 언제까지 떠돌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유리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배워 간다.
---「06_ 빅터 프랭클,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그게 인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