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은 두 번에 걸친 서역 원정을 감행했으나 한나라의 흉노 제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건이 가져온 대원의 명마 ‘한혈마(汗血馬)’에 대한 정보는 한나라의 기병이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무제는 대원의 명마를 구하기 위해 이광리를 파견했으며, 기원전 101년에 이광리는 대원의 이사성을 함락하고 수천의 명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강력한 기병을 갖게 된 한나라는 흉노에게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원 정벌은 서역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게 하여 한나라 상인들은 서역과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다. 서역에서 한나라로 유입된 것은 콩, 포도, 석류, 호도, 마늘, 수박 등이 있으며, 이러한 농작물들은 다시 황하, 양쯔 강 유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또한 향료, 옥 같은 사치품과 목화, 양모 같은 생필품도 들어왔으며, 코끼리, 사자, 공작새 등이 들어와 사육되었다. 또한 서역에서 음악, 춤, 악기, 곡예 등이 전해져 한나라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수출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단이다. 비단을 수출함으로써 한과 서역의 교역로는 ‘실크로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비단은 서역 국가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수백 년 후에는 로마까지 운송되었다.
비단길 개척으로 한나라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국가들과 활발한 상업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단길에는 동서 간의 공식적인 경제 문화 교류라는 의미가 더해지니 이야말로 중국사에서 진정한 외교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_ BC 139년│비단길 개척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성립되기까지 전후 10여 년간, 특히 양제의 재위 기간에 중국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반란 집단은 10여 명 단위의 소규모 집단부터 몇십만을 넘는 대규모 집단까지 약 200여 개에 달했다. 원인은 양제의 동도 건설, 대운하 건설, 강도 유람, 고구려 원정 등 지나친 사치와 폭정에서 비롯된 가혹한 세금 징수와 부역 징발 때문이었다. (중략)
이연은 중국의 역사가 서위, 북주, 수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배층을 이루었던 관롱집단(關朧集團)의 일원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연의 어머니인 독고씨는 서위 8주국 독고신의 딸로 수 문제의 독고황후와 자매였다. 즉 양제와 이연은 이종사촌이었던 것이다. 613년, 양제는 고구려 원정 때 고구려로 도망친 곡사정의 친척인 홍화군의 유수를 파면하고 대신 이연을 임명했다. 이로써 이연은 섬서성에서 감숙성에 이르는 13개 군의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연은 천하의 주인 자리에 욕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향락에 빠진 것처럼 가장해 양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중략)
이연은 3만의 군으로 대장군부를 구성하고, 배적(裵寂)을 장사, 유문정(劉文靜)을 사마로 임명했다. 군은 좌, 우, 중 3군으로 편성했으며, 좌군은 장남 이건성(李建成)이, 우군은 이세민이 통솔했다. 이연의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은 중군을 맡아 태원의 수비를 담당했다. 7월에 출병한 이연은 도중에 수나라 군대의 저항으로 곤경에 처했으나,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곽읍, 임분, 강군, 한성, 풍익을 차례대로 함락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장안을 함락했다. 당시 이연의 군대는 20만 대군으로 늘어나 있었다.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한 고조 유방이 관중에 입성했을 때 진나라의 악법을 폐지한 것을 본떠 수나라의 법률을 폐지하고, 군사의 약탈을 금하고, 국고를 폐쇄해 지도와 호적 등을 보존했다. 그리고 양제의 손자 양유侑)를 공제(恭帝)로 옹립하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추존하는 등 선양을 준비했다.
618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상황이 된 양제가 신임했던 장군 우문술의 장남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이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공제에게 양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연은 자신이 당왕(唐王)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당, 연호를 무덕(武德)으로 정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당나라가 창업되었다.
_ 617년│이연의 거병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