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문화적 양서류다. 인간은 메마른 문화의 사막에서는 살 수 없다. 앞서 살았던 이들이 축적한 문화 속을 유영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물거품 같은 삶 속에서 문화라는 또 다른 물거품을 만들고, 그 물거품들이 모여 마침내 깊고 넓은 문화의 바다가 된다. 인간이 풍요롭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문화의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산다는 것이다. 인간이 허무한 삶을 그나마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깊고 넓은 문화 속에서 유영하기 때문이다. (중략)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공간적 제약 때문에 채 싣지 못했던 도판과 해설을 마음껏 실으면서 바다로 돌아가는 양서류 인간처럼 희열을 느꼈다. 천천히 삶의 욕조에 물을 채우는 기분으로 이 책에 들어갈 그림을 고르고 텍스트를 선정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좀 더 풍부한 상징과 기호와 이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기를 기원하면서.
---「책을 펴내며」 중에서
제작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이 판화의 주제는 ‘덧없음’이다. 왼쪽에 있는 모래시계를 보라, 시간 속의 존재들은 아이가 불고 있는 거품처럼 사라져갈 것이다. 아이가 끌어안고 있는 해골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화병 속의 꽃조차 예외가 아니다. 다른 시간 속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저 꽃도 시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이 판화의 왼쪽 배경에는 다름 아닌 무덤에서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시간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모든 것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존재들만 덧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보다」 중에서
이것은 추상인가, 구상인가?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그림을 보여주자 총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손도끼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유명 가수의 가발이라고 평한 사람도 있었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머리 부분만” 그렸다고 농담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그림을 일종의 구상화로 본 것이다. 반면, 이 그림을 일종의 추상화로 보며 감탄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그림이 추상이냐 구상이냐 여부도 상당 부분 보는 자의 눈에 달린 것이다.
---「구상과 추상을 넘어서」 중에서
앞에서 살펴본 한스 발둥 그린의 〈인생의 세 시기와 죽음〉과 함께 보면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다.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 늙은 여성, 해골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맨 오른쪽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시간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서 있다. 가운데 있는 늙은 여성은 젊은 여성을 죽음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젊은 여성은 그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듯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림 아래쪽 배경에는 악마가 사람들을 고문하는 지옥이 그려져 있고, 위쪽 배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승천하고 있다.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가 심각한 눈으로 관람자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모두 늙어 죽기 마련이니 지옥에 떨어지지 말고, 천국의 길을 가라고.
---「결국 다가오는 노년」 중에서
사람이 그려진 그림에서는 보통 사람이 주인공이다. 에런 모스의 그림에서는 다르다. 그가 그린 것은 구름의 세계이고, 그 아래를 지나는 인간과 동물은 배경에 불과하다. 만약 구름이 초현실을 상징한다면, 초현실의 세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셈이다. 화가는 관객이 자기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잠시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현실을 잊고 자신이 창조한 환상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구름과의 만남」 중에서
엄격히 말하면, 모사와 창작의 분명한 경계는 없다. 아무리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고자 해도, 모사 과정에서 예술적 자아의 흔적이 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사와 창작의 진정한 차이는 창작 여부가 아니라, 창작하는 과정에서 견지한 지향점이다. 최대한 자아의 표현을 절제하고 외부 세계의 경험에 충실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외부 세계를 자아 표현의 재료로서 이용하는가, 혹은 자아와 세계가 만났을 때 생기는 마찰음을 표현하고자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자아와 세계의 경계를 지우는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가, 이것이 관건이다.
---「모사와 창작의 경계에서」 중에서
성당 혹은 교회는 그 압도적인 외관뿐 아니라 정교한 내부 역시 지속적으로 재현 대상이 되어왔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에마뉘얼 더 비터가 그린 암스테르담의 ‘신교회(the Nieuwe Kerk)’가 좋은 예이다. 초월을 지향하는 압도적이고 정교한 내부 속에 다양한 필멸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인부가 필멸자를 위해 무덤을 파고 있다. 특정 개인은 필멸하지만, 인간은 또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점을 확인이라도 하듯, 커다란 기둥 뒤쪽에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가 보인다.
---「성당을 보다」 중에서
소식이 구상하는 이상 세계는, 국가가 지방사회의 자율성을 상당 부분 보장하고, 그런 자율적 영역은 개인의 창의적 해결과 즐거움의 대상으로 맡겨두는 곳이다. 정부는 국가 중심의 획일적 질서를 강요하지 말고, 정부에 포섭되지 않는 삶의 다양한 측면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개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관점을 운용하며 자신의 삶을 창의적으로 구성하고 음미한다. 그게 각자 할 일이다. 이런 비전 속에서는, 삶의 문제들이 정부의 일률적 해결책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적이고, 미시적이고, 창의적이고, 맥락 의존적인 해결책에 의존한다.
---「소식의 「적벽부」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