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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 정지돈 첫 번째 연작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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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248g | 118*195*20mm
ISBN13 9791160263060
ISBN10 116026306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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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이 걷는 것을 묘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이기 때문이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시는 걸음을 영원한 행위로 만든다. 또는 순간으로.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중에서

엠의 말처럼 파리는 공유 킥보드로 가득했다. 바구니에 바게트를 실은 자전거는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힘들게 페달을 밟지 않고 자기 차를 소유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는다. 정거장도 필요 없고 주차장도 필요 없고 아케이드도 필요 없다. (...)
이동 수단은 정치 체제다. 대의민주주의와 국민국가는 공유경제로 인해 와해될 것이다.
대신 거대 기업이 세계를 통합하고?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중에서

엠은 운전대를 쥐고 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영국 비평가 스콧 딕슨의 기록에 따르면 야간 운전은 허공에 떠 있는 널빤지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속도, 방향, 움직임의 감각은 송두리째 사라지며 엔진의 저음과 홍예의 속삭임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곧이어 나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스콧 딕슨의 글은 운전이 인류의 필수 기예가 되기 전 그 낯섦을 담은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이다. 엠은 인공 불빛이 존재하지 않는 이국의 해안 마을에서 20세기 초 야간 운전자들의 시계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아이는 아주 귀여웠고 어렸기 때문에 인형을 보면 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눈알을 빼려고 했다」중에서

엠은 10구로 돌아와 카페에서 커피와 뺑오레쟁을 먹었고 집으로 오는 길에 편집숍에서 데님을 샀다고 말했다. 평소에 눈여겨봐둔 일본 브랜드의 오카야마산 데님이었는데 팔더라구.
한국보다 더 싸게?
아니, 더 비싸게.
그런데 왜 샀느냐고 묻자 엠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소비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물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허영심 같은 거야?
아니. 지정학. 엠이 말했다.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중에서

들뢰즈가 말한 좌파의 조건이 떠올랐다. “좌파라는 것은”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그에게 좌파는 거리의 문제였고 지정학적 인간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 멀리 있는 사건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반면 우파는 자신의 앞마당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좌우 모두 보수주의자다……. 너는? 흐릿한 형체의 엠이 묻는다. 나는 나를 위협하던 백인의 금발 머리칼과 팔뚝을 떠올린다. 나는…… 멀리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관념과 매체 속에서 공간처럼 오갈 수 있는 장소다…….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중에서

미색 A4 용지에 빽빽이 인쇄된 소설이 있었다. 제목은 ‘다람쥐 우리’, 쓴 사람은 미치-미치. 호준은 수줍게 웃으며 미치-미치가 필명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사람이 별 특이할 게 없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타이밍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미치-미치는 아닌 거 같아요, 라고 나는 시간이 꽤나 흐른 뒤 호준에게 말했다. 필명으로 쓰기엔 지나치게 튀는 이름이었다.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얼마 전에 개명을 했다고 말이다. 개명이요? 호준은 본명을 미치 미치로 바꿨다고 했다.
---「내부순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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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고 있는 작품을 보았을 때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가리켜야 할까? 어쩌면, 너무 쉽게 잊혀졌던 사람들과 생각들과 연결고리들을, 아니 사실은 잊혀진지도,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것들 사이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연결을 만드는, ‘발굴’해서 ‘박제’해 보인다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곧장 달려나가는 일종의 ‘탈것’을 만들어내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형태적으로 여러 군데에 흩어진 파편들을 섬광처럼 한꺼번에 드러내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 자체가 중요한 예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들을 읽었고 썼다.
- 안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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