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는 묵상기도, 관상기도, 대화기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관상기도는 하나님 안에 머물러 그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며, 대화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는 신심(信心)기도와 직관(直觀)기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직관기도는 바로 관상기도를 말하는 것이 고, 신심기도는 그동안 우리가 보통 해 오던 말하는 기도입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경우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것은, 기도는 생각에서 마음으로, 즉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기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좋은 곳이 되지 못합니다.
자리를 바르고 편하게 해 보겠습니다.
잠시 호흡을 알아차려 보세요.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목이 말라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하나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천국은 이곳이나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렇게 오고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여기로’의 여행을 경험하신 분은 느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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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는 것은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뭐나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아하! 내가 별것이 아니로구나! 그 무엇도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지요. ‘내가 그 무엇도 아니다.’에서 오는 존재의 편안함. 이것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라 그 누구도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가벼움, 자유, 해방. 느낀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은 비범을 한 번 만나거나 거쳐야 합니다. 비범이 십자가라면 평범은 부활에 해당된다고나 할까요.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듯이 말입니다. 수련이라는 것은 인위로 이 비범을 만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스승을 만나는 것이지요. 일을 만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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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생애 최고의 자산입니다. 상처는 내가 나 될 수 있는 땔감입니다. 땔감이 있어야 자동차가 가고 비행기가 날 수 있습니다. 땔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처, 고통으로 많이 아파하는 분들이 은총을 입었을 때 비로소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고통을 피하지 마십시오. 고통 없기를 기도하지 마십시오. 바깥 날씨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요. 거기에 따라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이 기법을 터득하고 나면 마음의 날씨만큼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의지대로 내 마음을 다루는 길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권세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처음 사람 아담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창조적 지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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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은 무슨 도깨비방망이 같은 힘과 요술을 부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독심술을 가져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성은 깨어나서 나의 나 됨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해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역사와 사물을 이해하게 되어, 그 누구와도 막히지 않고 그 무엇과도 걸리지 않는 사랑과 자유로 사는 구체적 삶이요, 그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깨어났다는 말은 지금 있는 것부터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머리와 가슴은 없는 것에 매여 있고 그 어떤 특별하고 유별난 것에 붙들려 있어서, 지금 있는 것은 못 누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데만 온 에너지를 써 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꿈꾸거나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꿈과 잠인 줄 모르고 실제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 연습은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연습입니다.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되어 감을 누리십시오. 그것을 구체적으로 찾아 적어 보거나, 또 말로 하여 자기 귀로 들어보십시오. 녹음을 하여 명상용으로 듣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내 생각 안에만 있던 주님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해방됩니다. 땅에 매이면 하늘에 매이고,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법입니다. 내 생각이 끝나야 하늘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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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어떤 기도를 하느냐는 바로 어떤 삶을 사느냐와 같다고나 할까요. 또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와 같은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에서 너를 향하고, 이웃을 향하고, 나라를 향하고, 인류를 향한 기도를 해 본다면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이웃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중보기도에 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성경에는 주기도문 외에는 어떻게 기도하라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또 사도들이 기도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추론하여 기도의 방법을 찾는 데는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시몬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누가복음서 22: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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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샤워 도중에 최고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최고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누워 잠자기 전에 많은 창조적인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일단 가만히 눕습니다. 누워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들리는 소리 다 듣습니다. 무게감을 느낍니다. 그때 찾아오는 고요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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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최고의 치유자는 뭐니 뭐니 해도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입니다. 서로의 수치와 두려움, 죄스러움을 벗도록 정죄 없이 그냥 안아 주고 덮어 주는 일이 바로 사랑 중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사랑은 느낌(feeling)이 아닙니다. 일(work)입니다. 일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도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통해, 사랑을 통해 내가 나 되어 가고, 그 나 됨이 정말 좋다는 세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합시다. 고발과 정죄는 종교세계가 아닙니다. 도덕이요 율법입니다. 정치요 운동입니다. 이 율법을 넘어 사랑의 법이 우리 가정과 부부 사이에 늘 흐르도록 해서 에덴을 회복해 나갑시다. 이것이 진정한 혁명 중의 혁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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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낮과 밤으로 이루어졌듯이 생(生) 또한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완성시켜 주는 마디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왜 두려워하고 마치 자기에게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죽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럼 죽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번 죽어 보는 것으로 조금은 알 수가 있을까요? 물론 죽음은 삶 속에 있으니까 전체로 살 때 죽음도 맞이할 수 있겠지요.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