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무렵이면 한겨울 묵은 옷가지를 모아 빨고 자신이 덥던 이불 베개를 모두 꺼내 깨끗이 빱니다. 다음 사람이 오면 새것처럼 쓰게 말이지요. 초참 시절에는 해제가 그렇게 기다려지더니 나이가 한 살, 구력이 한 살 먹다 보니 그렇게 기쁜 기다림은 아니더이다. 결제(結制)도 해제도, 만남과 이별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인가요. 부처님 당시에도 한 나무 아래서 삼일 이상 머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아마도 사람은 한곳에 머물면 집착하기가 쉬우므로 그리하였을 거로 생각합니다.
---「p17. 걸망과 누비.」중에서
※죽비는 또한 경책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일과를 일탈하거나 잘못이 있으면 백 팔 배, 오 백 배, 천 팔십 배 심하면 삼천 배까지 참회의 절을 시킵니다. 보통 두 번, 세 번까지 참회를 시키고 안 되면 경책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절에서는 죽비 공양이라고 합니다. 정진하다가 졸 때는 어깨에 장군 죽비를 내려 졸음을 가시어 또렷한 의식으로 정진하게 도와줍니다.죽비 공양이 들어갈 때도 절차는 분명합니다. 대중공사 끝에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경책을 받는 스님은 무릎 꿇어 앉아 있고, 죽비 공양을 내리는 스님은 그 스님에게 다가가서 합장 반 배 한 후, ‘공양을 받으시겠습니까?’라고 의사를 묻습니다. 안 받겠다고 하면 거기서 대중공사는 끝나고 스님은 걸망을 지고 절을 떠나는 것입니다. 받겠다고 하면 무릎 위의 장삼을 양옆으로 흩어놓고 허리를 뒤로 젖혀서 양팔로 방바닥을 집고 의지하여 최대한 무릎 위에 죽비가 잘 내려칠 수 있도록 돕습니다.장삼을 죽비가 닿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장삼은 부처님 옷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중살이는 엄격한 질서가 살아 있어서 대중의 어려움과 무서움을 몸과 마음으로 익힙니다.
---「p24. 아상과 아집을 꺾는 회초리, 죽비.」중에서
※“여기 내 손 안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있는데, 계속 들고 있으면 이새가 죽을 것이고, 내가 이 주먹을 풀면 새가 날아가 버릴 것인데 자네라면 어찌하겠는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선가에서는 선문답이라고 하고, 거량이라고도 합니다. 답답하기도 하고, 영감쟁이가 원망스럽고 부끄럽기도 하여, 자리를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사실, 나는 두세 번의 견처가 있었다고 자부하던 터였는데,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았습니다. 그 노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만공 스님 문하에서 참학하였던 은둔 고수이셨습니다. 그대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49p. 얻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取不得 捨不得.」중에서
※선덕(조실 급)이신 성우 스님도 같이 줄을 서서, 누룽지 한 조각을 얻고는 행복해 하시는데, 정광 스님께서는 채신을 지키시려는 것인지, 한 번도 그 누룽지를 얻어 드시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궁금은 하신 지 이따금 곁눈질로 바라만 보고는 그대로 지나쳐가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부 공양주한테 ‘스님! 내가 쓸 때가 있어서 그러하니 한 조각 더 주시오’라고 하며 한 점 더 얻었습니다. 그 철에 내 소임이 청중이었습니다. 학교로 치면 부반장쯤 되고 권세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 권세의 힘으로 누룽지 한 조각을 더 얻어 선덕이신 정광 스님께 달려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누룽지를 드렸더니 금세 웃음기 가득한 아이 얼굴이 되었습니다. 어른을 여러 철 모시고 살았지만, 사적인 말씀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얼굴에 표정도 무표정 그 자체이었습니다. 선가에서는 꽉 막힌 상태를 은산 철벽이라는 단어로 가끔 쓰기도 하는데, 그 은산 철벽의 문을 열었습니다.
---「p73. 봉암사와 누룽지」중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쪽의 울림은 동시에 남서북으로 전달하지요. 나는 인이면서 항상 연이 된다는 것이 인연의 법칙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잔 떠주고, 배고픈 이에게 국수 한 그릇 사드리는 것이 결코 작은 일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서정주 님의 보석 같은 시어(詩語)처럼, “한 송이 노란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 봅니다.” 당신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연이고 나의 바람은 당신에게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핀 노란 국화꽃이고 싶습니다.
---「p194. 인은 씨앗이요, 연은 그 씨앗이 발아할 수 있는 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