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삶은 고사하고 종교의 가르침마저 역사 속 유물처럼 여기는 오늘날, 수도사의 일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삶의 방식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세속의 성취와 영광을 갈망하고 경배하지만, 그 욕망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욕망 추구가 자신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수도사의 일상이 재현하는 가치를 단순히 거룩, 경건, 겸손 같은 종교용어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그 가치는 잃어버린 교회의 시간,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데 있다. 종교의 쓰임새가 욕망의 부추김을 정당화하는 데 있지 않고 멈추어 서서 되돌아보는 데 있음을 보여 줄 때, 수도사의 일상은 회랑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 pp.75~76
이 수도회 운동들은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마지막 모습은 유사했다. 개혁 주체가 개혁하려던 대상과 똑같아지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한 개인이나 조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복되는 패턴이다. 여기에서 던져야 할 물음은, ‘그들이 왜 끝자락에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담아낼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생성되고 있는가?’이다. 수도회주의는 급진적인 그리스도교다.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지나치다.
--- p.119
언제나 그렇듯 가장 이상적인 입장은 현실에 적용하기는 곤란할 때가 많다. 급진적인 만큼 현실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 급진적인 주장에서 끄집어내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 탁발 수도회는 교회가 재산을 포함하여 세속의 권력 등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살길로 제시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며 노래를 부른 것처럼, 아비뇽 유수기의 교회는 사도 교회가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했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땅에서 교회가 가진 힘을 포기하는 일, 그것이 사도적 청빈의 핵심이다. 때로 주장 자체가 극단적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중세 말 내내 사도적 청빈 논쟁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회가 지향할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는 방증이다.
--- pp.158~159
수녀원이 가졌던 힘의 원천은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제한이 있고 제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이 공간성에 대한 고민은 여성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교회에 여전히 주어져 있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교회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여성이 들어가거나 설 수 있는 자리, 말할 수 있는 자리는 남성에게 주어진 공간보다 훨씬 적다. 교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이며, 이는 곧 교회를 해치는 소리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느끼는 건 혼자만의 오해는 아닐 듯하다. 한계가 노정되어 있음에도, 제도적으로 허락된 수녀원이라는 공간은 분명하게 그 역할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p.181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 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제도 교회는 지배적인 시대 분위기 앞에서 저항자의 자리에 서서 사회 변화를 추동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지배 문화와 가치를 전달하고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 그 속에서 서로 권력과 영향력을 향유한다. 문명이 지향하는 가치,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노예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는 종교에 적대적이라고 알려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만큼이나 종교 친화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