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은 오직 조사의 관關을 뚫는 것이고, 묘오妙悟는 심로心路를 다하여 끊는 것이다. 조사의 관을 뚫지 않고 심로가 끊어지지 않으면, 이는 모두 풀이나 나무에 붙어사는 정령精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조사의 관이란 무엇인가. 다만 이 ‘무無’ 한 자字가 곧 종문宗門의 관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이름하여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한다.
--- pp.26~27
문자나 언구에 매달려 선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치려 하고, 신발 위에서 가려운 발을 긁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 p.21
광활한 길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지만, 그 문은 어떤 길로도 통한다. 이 관문을 뚫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팔을 크게 흔들며 우주를 활보하는 자유인이 되리라.
--- p.23
이 공안(‘백장과 여우’)에서 ‘여우’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선가禪家에는 진리의 당체當體를 가리키는 고정된 용어가 없다. 기독교에서는 ‘신God’이라 하고, 유대교에서는 ‘여호와’,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정토교에서는 ‘아미타불’,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 천태종에서는 ‘묘법’이라고 하는 등, 종파마다 각각 특정한 용어로 진리의 당체를 표현하지만, 선가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진리를 ‘무엇’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개념’으로 화석화化石化되어 생동하는 생명력을 잃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가에서는 그때그때 적절한 용어를 사용한다. ‘무 자無字’ ‘구자狗子’ ‘여우’ ‘손가락’ ‘수염’ ‘전나무’ ‘마삼근麻三斤’ 등, 닥치는 대로 그때그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여, ‘우주는 하나’라고 하는 참된 사실, 즉 ‘진실한 나’를 나타내고자 한다. 이 공안에서의 여우는 그러한 의미이다. ‘여우’라는 말로 참된 자기의 본성을 보인 것이다. 그 ‘본성’을 사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교 교리이며, 그 본성의 공능功能을 자기 생활로, 자기의 인격으로 삼는 것이 선 수행이다.
--- p.43
공성空性을 참으로 투득透得하면, 인과의 법칙에 따라 무엇이 되어도 이의異議가 없다. 언제나 순간순간의 생활에 만족하고 안주한다. 이를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우가 되었다면 여우로 좋다. 인간이 굳이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없을 때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이러한 의미의 성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 p.48
달마의 초상화를 보면 수염이 덥수룩이 나 있고 모포를 머리 위까지 쓰고 손을 그 속에 감추고 있다. 달마는 더운 나라인 남천축국(인도 남부)에서 중국으로 왔고, 북쪽 지방 소림사에서 수행을 하였으므로 추위에 아주 약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수염과 모포는 방한을 위해서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달마의 모습을 연상하는 우리에게 엉뚱하게도 ‘서천 호자에게 수염이 왜 없는가’라며 흑암은 주의를 환기시킨다. 수염이 없는 자에게 수염이 왜 없는지 묻기보다, 수염이 있는 자에게 수염이 왜 없느냐고 묻는 쪽이 훨씬 집중하도록 만든다. 선 지도 방법의 일환이다.
--- p.59
정법正法은 사법邪法에 상대되는 의미가 아니다. ‘정’은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평등하고 무성無性하다고 하는 ‘공空’을 표현하는 말이다. ‘법’은 차별적 현상을 뜻한다. 차별이 있는 현실의 모습을 ‘법’이라는 한 글자로 나타낸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각각 차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차별은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두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모습이기 때문에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정’은 내용의 평등을 보이고 ‘법’은 외관의 차별을 보이므로, ‘정법’은 모든 존재의 평등한 본질과 차별적 현상을 아우른다.
--- p.69
‘깨달음’이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것이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불도라는 것은 일상생활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생활이 바로 불도이다. 진실한 생활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의 그릇된 이분-대립 관념이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대립 관념의 지배를 받아,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개체주의적인 생각으로 융화와 화합, 공유와 상생의 생활이 안 된다. 그래서 평화로운 생활, 행복한 생활이 쉽지 않다. 우리가 진정 대립 관념의 잘못을 깨닫고 순수하고 진실한 생활을 하려면, 죽을 먹을 때 죽을 먹고, 그릇을 씻을 때 그릇을 씻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생활의 진실한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p.75
수행자는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동중이변同中異辯] 안목과, 다른 것을 같게 말하는[이중동변異中同辯]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문이 “만약 두 암주에게 우열이 있다고 하면 아직 참학의 눈을 갖추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은 다른 가운데 같게 말하는 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고, “만약 우열이 없다고 해도 아직 참학의 눈을 갖추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눈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있어서 같은데 다르게 말하고, 다른데 같게 말할 수 있는 안목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무문의 제창이다.
--- p.102
자아는 환경의 산물로, 늘 환경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환경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은 환경에 끌려다니고 있다. 순탄하면 그것에 빠지고 역경을 만나면 그것에 괴로워한다. 순역順逆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이끌어 늘 이것을 잘 쓰고 활용하지 않으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다.
--- p.105
그러나 ‘평상심시도’라는 말은 자칫 수행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즉 일상생활이 도라면, 따로 좌선할 필요도 없고 일부러 깨달으려 애쓸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따질 수도 있다. 농부는 밭 가는 것이 도이고, 상인은 장사를 잘하는 것이 도이고, 관리나 회사원은 다만 근무에 충실한 것이 도이니, 특별한 깨달음이나 혹은 좌선 수행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견斷見이다.
--- p.148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생각은 인간의 뛰어난 장점이지만, 반면에 허물이 되고 폐해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은 종교를 낳고 철학·과학·예술을 낳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 귀한 능력이, 사람을 괴롭게 만들고, 마음을 혼란시켜 급기야 자살로 유도하기도 하고, 가정에 파탄을 일으키고, 국가나 사회가 서로 다투게 하고, 세계 인류를 대립·투쟁으로 이끌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이 주는 병폐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제’라는 것은 인간을 생각이라는 병폐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생각의 병폐로부터의 해방이란 필요와 불필요, 유해무해, 유익무익을 생각하지 않고, 본래의 건전한 자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의 기초이다. 이 가르침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의 첫 번째는 정견正見이다. 즉 바른 견해이다. 불교에서는 생각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보는 정견을 확립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타 대립의 망견 착각을 부수어야 한다. 대립의 망견이 깨지고 절대의 자기로 향해야만 비로소 정견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견성오도이다.
--- p.161
‘말과 침묵, 이미에 미친다[語默涉離微]’라는 말은 승조僧肇(383-414)의 《보장론寶藏論》 〈이미체정품離微體淨品〉에 나오는 말이다. 승조 법사가 좌선 중 마음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썼던 말이다. ‘이離’는 주관, 즉 체體를 뜻하고 ‘미微’는 객관, 즉 용用을 가리킨다. 교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색상色相을 끊은 진여평등이 이離이며, 현상차별로 나타난 용이 미微이다. 평등과 차별이 섞여 한 몸이 된 것이 본래 청정한 진리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본체를 ‘이미離微’라고 했다. 그런데 우주의 근원이나 법의 본체를 말로써 표현하면 ‘미’, 즉 현상에 떨어져버린다. 만약 침묵으로써 표현하면 ‘이’, 즉 평등 융합에 떨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평등 융합의 일면에 떨어지고 말을 하면 차별의 일면에 떨어진다. 이것이 ‘말과 침묵은 이와 미에 미친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 p.180
선의 묘지妙旨는 천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에도, 지금도, 눈앞에 당당히 드러나 있어서, 일 구를 말하기 이전에 이미 명료하게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깨달음이란 지금부터 깨달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 p.183
기독교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라는 말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말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부처’도 ‘지’도 ‘도’도 모두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이 붙여지면 그것이 개념이 되어 의미가 결정되고, 그것의 색채가 나오고, 그것이 고정관념이 되고, 그 관념에 속아 본래의 사실은 잊어버리고 만다. 일단 과감히 그러한 관념이나 말을 전부 버리면 본래의 백지가 된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본래의 면목, 참된 사실이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고 남전은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 ‘지는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 p.242
말을 아무리 교묘히 잘해도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밝힐 수 없다. 입으로 불[火]이라고 말해도 입은 타지 않고, 물이라고 말해도 목은 젖지 않는다. 진실은 언어표현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지만, 일단 만들어진 언어표현은 진실의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구는 기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은, 진실을 체득하지 않는 한 어떠한 교묘한 표현도 그것은 사상·개념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체험을 수반하지 않은 개념은 진실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