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으면 복수도 할 수 없다. 물론 화풀이로 지나가던 죄 없는 어린애 하나를 붙잡아 뺨을 때리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복수를 마음먹은 사람이 아닌 복수를 당하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열일곱 살 화영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대의 새로운 신이자 흉기인 돈을 쥐는 것이었다. 돈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돈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돈으로 끝맺을 수 있다. 오래전 누군가의 가르침처럼, 화영은 그렇다고 믿었다. --- p.8
저 멀리 한결 가까워진 레인보우 아파트가 보였다. 어둠에 잠긴 주택가를 지나가던 순간이었다. 골목길 한구석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화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런 가로등 밑에 아직 수거하지 않은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주위로 배고픈 길고양이들이 서성였다. 쓰레기 더미와 담벼락 사이에 비스듬히 기댄 둥근 형체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가로등 아래 검고 동그란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지저분하고 꼬질꼬질한 털에 비해 그 눈만은 또렷했다. 화영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곰 인형을 둘러싸고 있던 고양이들이 화영을 노려보더니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골목길에는 화영과 털 뭉치만이 남았다. “해피 스마일 베어.” 화영은 곰 인형의 잃어버린 이름을 중얼거렸다. 흠집이 가득한 플라스틱 눈동자를 화영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것을 안아 들고 소리 내어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 pp.31~32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손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꽤 깊숙이 박아 넣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서슬 퍼랬던 날이 온통 시뻘겠다. 그와 동시에, 손도끼 뒤에 선 물체에 시선이 닿았다. 그것은, 분명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화영의 영원한 친구 해피 스마일 베어.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까만 플라스틱 눈알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여전히 남자는 다소 시끄러운 배경음처럼 성실하게 비명과 신음을 내질렀다. 화영은 신이 주신 탈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도끼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맑은 눈의 해피 스마일 베어가 기다렸다는 듯 두 발로 걸어 피 웅덩이 위 손도끼를 양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 아닌가. 진득한 피가 손잡이를 타고 흘러 베어의 한 팔을 물들였다. 곰 인형이 손도끼를 화영에게 건넸다. 화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들고 물었다. “날 구해 준 게 너야?” 곰 인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분명한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도망칠 거면 나도 데려가.” --- pp.49~50
“곰, 나 한 번만 더 도와주라. 그러면 나도 너 도와줄게.” “도와준다고?” “응. 뭐든. 그 몸으로는 마음대로 이동하기도 쉽지 않을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도하는 길고양이의 먹이가 될 뻔한 일을 떠올렸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사고 당한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단서는 비어 있는 기억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동안은 어쨌든 조력자가 필요했다. 사망한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뭐, 저승사자가 알아서 찾으러 오겠지. “내가 뭘 도와주면 돼?” “복수.” 화영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 pp.80~81
“돈은 때론 구원이 되기도 해.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단다.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있거든.” 돈, 나를 구할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 엄마가 씨더뷰파크 펜트하우스에서 일했던 건 그곳이 엄마의 시간에 가장 높은 금액을 지불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화영이 엄마를 보러 갈 때마다 허리를 한껏 비틀어 숙여야 하는 건 돈이 없기 때문이다. 화영은 한정혁의 화려한 봉안당을 떠올렸다. 완벽하고 사치스러운 애도의 공간. 화영은 여자에게 물었다. “돈이 구원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은 구원자?” 여자는 답했다. “난 그냥 늙고 계산적인 여자야.” “그럼 구원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여자의 시선이 골목 밖을 가리켰다. 분홍색 하늘 밑으로 공사장이 펼쳐졌고, 그 너머에 우뚝 솟은, 낡은 아파트가 보였다. 레인보우 아파트. 온갖 범죄자와 문제아가 모이는 야무시의 골칫덩이. 저 멀리 신기루처럼 자리한 레인보우 아파트를 홀린 것처럼 응시하던 화영이 여자를 향해 외치듯 물었다. “그 구원, 제가 살게요. 얼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