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지름길은 다른 대륙의 도시와 비교하는 것이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배낭여행자에게도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 도시의 차이점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럽 도시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건물과 성당, 역사적 도로와 기념물, 풍족한 유물과 박물관이 넘쳐난다. 북미 도시는 마천루의 웅장한 위엄과 자동차로 넘치는 도로가 인상적이다. 아시아는 높은 인구 밀도를 자랑하며 현대적이면서도 다소 혼란스러운 역동적인 풍경이 펼쳐진다.---프롤로그: 유럽의 도시 네트워크
파리는 유럽통합의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역사에서도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평화의 유럽을 만들자는 생각이 싹튼 것은, 유럽의 아버지 장 모네가 해방 프랑스 정국에서 경제계획부 장관으로 있을 때다. 그는 외무부 장관 로베르 슈만에게 자신의 구상을 전달했고, 슈만은 프랑스 외무성이 있는 파리의 케도르세에서 1950년 5월 9일 ‘슈만 플랜’을 발표하며 초국적 통합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리고 프랑스의 적극적 외교로 1951년 4월 18일에는 파리 조약을 통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탄생하게 되었다.---파리_ 혁명과 시위의 수도
유럽인들이 유럽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실질적으로 유럽통합을 시작한 이유는 그들이 직면한 소위 ‘독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유럽 사람들에게 독일 문제란, 유럽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독일이 유럽 전체를 장악하여 ‘독일의 유럽’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을 의미했다. 유럽인들에게 독일 문제는 무엇보다도 독일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잠재적 또는 현실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절박한 공포감을 뜻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독일 문제를 유럽통합과 함께 해결한다는 것은 독일을 유럽 안으로 끌어안아서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베를린_ 전쟁에서 평화로, 분단에서 통일
1815년 빈 회의는 제국의 수도가 마지막으로 개최한 국제행사였으며, 이후 빈은 서유럽적인 새로운 유럽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19세기 유럽의 정치적 메인스트림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였으며, 바로크적인 거대한 다민족국가의 수도 빈은 변방 신세로 전락했다. 변화의 진원지인 서유럽이 유럽의 중심이 되었고, 빈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쇠한 제국의 수도였다. 어차피 생명이 끝나가는 제국의 숨통을 끊어준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은 거대한 다민족국가를 해체시키고 오스트리아를 중유럽의 소국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로 인해 빈은 하루아침에 작은 나라의 거대한 수도가 되어버렸다.---빈_ 유럽의 변방에서 ‘유럽의 심장’으로
마차시 1세의 통치 기간은 유럽의 르네상스기에 해당된다. 당시 헝가리는 유럽의 문화, 예술의 한 중심지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마차시 왕의 왕비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가에서 맞아 들였으며, 부다의 궁정은 르네상스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고급문화의 중심지였다. 16세기까지는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이북으로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는데, 이런 점에서 부다의 르네상스 문화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시기 알프스 이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르네상스 왕국이었으며, 부다는 그 ‘르네상스 왕국’의 행정적·문화적 중심지였던 것이다.---부다페스트_ 통일성과 다양성의 역사 변주곡
세계의 수도임을 자랑하던 런던은 1950년대의 유럽통합 움직임(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유럽경제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통합의 잉태에 기여했다. 상당수의 유럽통합사는 1950년 프랑스의 장 모네가 제안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부터 다루고 있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모네조차 회고록의 첫머리를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런던에서 체류하면서 영국에 연합을 제안한 것부터 기술했다.---런던_ 글로벌리즘과 ‘유럽’ 사이에서
아테네는 유럽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도시이면서도, 역사가 아주 짧은 수도이기도 하다. 2012년 현재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찬란한 고대와 비틀거리는 오늘이 만나는 문화고고학적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아테네의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찬란한 고전 문명의 주역으로서 누구도 부인 못하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1991년 아테네는 민주주의 2,500주년 기념식을 가졌는데,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일어난 기원전 508년을 기점으로 본 것이다. 아테네는 고대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도시이자, 최고의 지성과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히포크라테스 등이 거닐었던 찬란한 문화의 도시이자, 서구 문명의 진원지였다.---아테네_ 찬란한 고대와 남루한 오늘의 만남
당시 여러 도시가 행정 수도 후보로 물망에 오른 가운데 브뤼셀이 최종 결정된 과정에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대도시라는 브뤼셀 자체의 경쟁력도 고려되었지만, 그 밖에도 지리상의 위치, 회원국 사이의 역학 관계 같은 국제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벨기에 출신으로 1952년부터 1954년까지 ECSC 최고관청위원장을 지낸 폴앙리 스파크의 정치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6개 회원국 가운데 이른바 빅3라 불리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중에 공동체의 주요 기관을 설치하면 회원국 사이의 역학관계 균형 유지에 어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소국인 벨기에의 브뤼셀에 힘을 실었다.---브뤼셀_ EU의 수도
스트라스부르는 현재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프랑스 영토지만, 세 가지 언어로 도시명이 표기된다. 프랑스어로 ‘Strasbourg’, 알자스어로 ‘Strossburi’, 독일어로 ‘Straßburg’인데, 이것만으로도 스트라스부르가 역사적으로 갈등 지역이었고, 지역이나 민족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소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시대라는 유럽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번갈아가며 스트라스부르를 점하였다. 알자스어를 쓰는 지역 주민은 두 국가의 점유에 따라 때로는 프랑스인으로 때로는 독일인으로 살아가야 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세 가지 언어로 표기되는 도시명은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스트라스부르_ 민족 갈등의 도시에서 통합 유럽의 수도로
유럽경제공동체가 1967년에 탄생한 유럽공동체를 거쳐 마침내 1992년에 유럽연합(EU)으로 결집되고 ‘6개국’에서 ‘12개국’으로 회원국이 늘어나는, 한 세대에 걸친 지난한 과정에서 룩셈부르크는 늘 ‘통합의 촉진자’ 편에 섰으며 회원국 사이의 분쟁과 이견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65년에 공동 농업 정책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다른 회원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타협점을 찾기 위해 회원국들이 이듬해 룩셈부르크에 모였다. 회원국의 만장일치 표결을 도입하기로 한 이른바 ‘룩셈부르크 타협’은 공동체가 분열 위기에서 벗어나 한층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85년에 공동체 회원국 사이에서 국경 통제를 폐지하는 ‘솅겐 조약’이 맺어진 곳도 룩셈부르크 남쪽 국경의 작은 마을 솅겐이었다.---룩셈부르크_ 통합 유럽의 앞날을 여는 천년 고도
유럽연합에 속해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을 도로로 연결한다면 그것이 곧 지리적 통합 아닐까? 도로는 선사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도로망의 골격은 오늘날이나 선사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국경 경비초소를 없애고 도로를 연결한다고 해서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로가 연결되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활동, 즉 교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도로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교류가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도로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도로로 연결된 여러 지역과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도로야말로 유럽통합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의 ‘문화도로’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첫 번째로 선정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