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얹어두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카운터를 지나 진열장 냉장고를 도는데 괜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히 고양이 울음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기가 여기 있을 리 없잖여. 금남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조그만 달과 별이 그려진 하얀 속싸개에 싸여 울고 있는 건 분명 아기였다.
--- p.17 「1장 안녕, 정이야」중에서
“자, 구구 팔팔 일이삼사! 짠!”
화통한 목소리로 금남이 구호를 외치자 아기띠에 안겨있던 아기가 소리 내어 방긋 웃었다.
“그려, 구구 팔팔 일이삼사!”
떡 여사가 금남을 따라 말하고 요구르트를 부딪쳤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사흘만 아프고 나흘째에는 하늘로 가자는 노인들만의 ‘웃픈’ 건배사였다.
“그럼, 해브 어 나이스 데이 혀고.”
금남이 무슨 말만 하면 아기가 웃었다. 큭 소리를 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잘 웃는 아기를 어떻게 두고 간 거야. 네 엄마도 참,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 p.34 「1장 안녕, 정이야」중에서
두 사람은 매주 수요일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에서 맛나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트리가 함께할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매운 걸 못 먹는 흥민은 해영 덕분에 조금씩 혀가 얼얼한 통증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밥을 끝까지 먹으면 나오는 금남의 쪽지도 서로 보여주며 함께 마음에 새기기도 했다. 그렇게 내일모레면 마흔인 해영과 열다섯 흥민은 친구가 되었다. 둘은 그날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흥민이 짝사랑하는 예정과 짝꿍이 되고 싶지만, 또 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둘은 최근 짝꿍이 됐고 그 후 흥민은 매일 학교에서 심장이 튀어나올까 봐 종일 칠판만 보고 화장실도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혹여나 냄새라도 날까 봐. 큭큭.
--- pp.126-127 「2장 안녕, 흥민아」중에서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뜨끈하고 매콤한 것이 들어가자 메슥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실패라는 단어를 마주하고 나니, 그간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조심하던 게 하릴없이 느껴졌다. 마음이 편하면 그땐 찾아와주겠지. 나의 예쁜 천사가. 해영이 울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밥을 다 먹었다. 금남이 남겨놓은 쪽지가 필요했다. 항상 웃음 가득한 그 분의 한마디가.
〈매운 음식 할 때 손이 얼마나 에린지 몰라. 고춧가루가 살에 닿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 쓰려. 오늘은 에리고 아픈 건 내가 다 할 테니. 먹는 당신은 해피하기만 하슈. 해브 어 나이스 데이 혀고!〉
큰 눈망울에서 결국 눈물이 톡 떨어졌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서툰 손으로 수능 도시락을 싸주던 아버지가. 이런 목소리로 전화하면 왜 코맹맹이 소리가 나냐고. 울었냐고. 병원에서 무슨 말 들었냐고. 빙빙 둘러 물어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식혜를 마셨다. 금남의 손맛이 가장 잘 느껴지는 음식이었다. 달고, 시원하고, 개운하고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맛. 그 맛에 삼켜냈다. 이 서러움을.
--- p.128 「2장 안녕, 흥민아」중에서
“그럼 남은 한 숟갈마저 먹어요.”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은석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 밑에 반짝거리는 은박쪽지가 접혀 있었다. 정이가 조심스럽게 은박지를 펼쳤다. 금남의 글씨가 쓰여 있는 흰 종이가 보였다.
〈가장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혀지? 왜 그 어린 프린스가 그랬잖여. 그럼 오늘 둘이 같은 걸 봐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소중한 걸 말야. 오케이?〉
정이의 목소리였지만, 왜인지 금남 할머니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음성 지원이 되는 말투였고, 온기가 느껴지는 위로였다. 바로 금남식 위로.
--- p.196 「3장 안녕, 미스터 달걀」중에서
금남이 생전 처음 뽑아 보는 타로카드에 살짝 긴장한 듯 카드를 왼쪽과 가운데 그리고 제일 끝에 있는 것을 뽑았다. 김 씨가 숨을 고르고 휙휙휙 뒤집었다. 목이 꺾인 듯 웅크리고 있는 사자,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저울을 들고 있는 황제, 다 된 모래시계가 해변에 떨어진 카드가 펼쳐진다.
미간을 찌푸린 김 씨를 보자 금남이 괜히 긴장이 되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어요. 쓸 수 있는 시간이요.”
“뭔 소리를 하슈? 시간이 다 됐다니?”
“카드가 그래요. 모래시계에 모래가… 한 톨도 없네요. 왜 이런 카드를 뽑으신 거지….”
김 씨가 눈을 굴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 pp.230-231 「4장 안녕, 문정아」중에서
택시 한 대가 금남의 앞에 섰다. 차에 몸을 실은 금남이 기사에게 말했다.
“압구정 백화점으로 가주슈!”
“백화점? 거긴 왜?”
문정이 물었지만 금남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이대로 굴복할 수 없었다. 요양원?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바로 금남식 투병이라는 듯. 보란 듯이 눈에 더 힘을 주고 동그랗게 떴다! 씩씩 거리며 창문 밖으로 멀어지는 병원을 쳐다보았다. 아니 째려보았다.
택시가 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곧장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발걸음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곧 여행 캐리어를 판매하는 매장 앞으로 갔다.
“여기서 제일로 큰 캐리어 하나 주슈!”
뒤따라온 문정이 금남의 뒷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본인도 무서우면서 두려우면서 그래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서 있으면서, 씩씩한 척 말하는 엄마를 보고 코끝이 찡해졌다.
--- pp.317-318 「5장 씨 유 어게인」중에서
내가 왜 하고 많은 장사 중에 밥장사를 했을까 돌이켜보면 내 지난날, 아주 많은 날 배고팠던 것 같어. 매일 굶고 허기지고…. 그래서 내 주방에 있는 주걱은 유난히 크고 내 도시락은 늘 넘치지. 나는 엄마 손은 약손이고 밥은 보약이라는 말을 믿거든. 내 손을 거친 음식이 그대들을 웃게 하고 울게 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거든.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거든. 요 며칠 또 그런 생각을 해봤잖여? 인생은 피었다 지는 거구나. 근데 지는 건 알겠는데, 도통 언제 피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 어쩌면 내내 피어 있던 거 아니겠어? 찬란하게 말여. 잊지 마. 그대는 항상 피어 있다는 걸.
--- pp.322-323 「5장 씨 유 어게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