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 돌아온 후, 다윈은 몇 년에 걸쳐 비글호 항해 기간에 써놓은 메모를 정리해 책을 쓰고 1839년 헨리 콜번(Henry Colburn) 출판사와 3권의 책을 냈다. 하지만 출판사와의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아 출판사를 바꾸려던 참이었다. 라이엘은 자신이 책을 낸 출판사 사장 머레이 3세에게 다윈을 소개했다. 머레이 3세는 기꺼이 다윈의 책을 단행본으로 재구성해서 《Home and colonial library》 시리즈의 일부로 출판했다. 45년간 이어질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이었다.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 원고를 머레이 3세에게 보냈다. 불안한 마음이 컸다. 첫 만남 이후 14년간 다윈은 몇 권의 책을 썼고 그때마다 머레이 3세는 출판해주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머레이에게 의미 있는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게다가 다윈은 이번 원고가 불러올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라이엘에게 보낸 편지에 머레이 3세가 종교적 이유로 출판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며 두려운 마음을 드러냈다. “내 책이 주제가 그래서 그렇지, 그렇게까지 정통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머레이에게) 말해야 할까? 난 인간의 기원에 대해 논한 것이 아니고, 천지창조 논의를 건드리지 않았고 단지 사실만을 제시할 뿐이다. 사실로부터 나온 결론이라 내게는 타당해 보인다. 그렇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까?” 세계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을 원고가 거절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중년의 찰스 다윈이다.
--- 「찰스 다윈과 존 머레이 출판사」 중에서
1960년, 바야흐로 시민운동의 시대가 도래했다. 헤퍼스는 상업화와 사회 운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마주했다. 서점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영국 책 판매인들은 ‘대안적 책상인 연합(Federation of Alternative Booksellers)’을 결성하여 인종과 여성, 동성애 등 여러 인권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급진적 책상인 연합(Federation of Radical Booksellers)’(1975)을 결성했다. 사회 운동 메시지를 전하는 서적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급진적 서점(Radical bookshop)”이 런던에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진적 서점에서는 주로 아나키즘, 동성애, 흑인과 제3세계 운동, 아일랜드 문제, 페미니즘 등에 관한 서적을 취급했다. 이들은 판매에 그치지 않고 두 달에 한 번씩 《Radical Bookseller》 잡지도 발간했다. 헤퍼스는 사회 운동을 특화한 쪽은 아니었다. 대신 ‘가격’에 집중하여 1964년에 저가 도서만 취급하는 헤퍼스 문고판 서점(Heffers Paperback Shop)을 열었다. 당시 펭귄(Penguin) 출판사는 질은 좋지 않지만 가격이 저렴한 종이와 소프트 커버를 사용한 저가 도서를 출판했다. 책값이 내려간 덕분에 독자들도 전보다 책을 마음껏 사 읽었고, 마침내 저가 도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문고판 서점은 펭귄의 전략에 발을 맞춘 아이디어였다. 1965년에는 아동 서적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헤퍼스 어린이 서점(Heffers Children’s bookshop)을 별도로 개장했다.
--- 「트리니티 20번지 헤퍼스_만능을 꿈꾸었던 서점」 중에서
순환도서관은 런던의 책상인 라이트(Wright)가 1730년경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칭은 약 10년이 지난 1740년, 새뮤얼 팬코트(Samuel Fancourt)가 자신이 솔즈베리에 세운 도서관을 “순환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광고를 낸 뒤로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주로 출판과 연계된 인쇄업자, 제본업자, 책 상인들이 이 사업 모델을 받아들였고 영국 사회는 뜨겁게 호응했다. 1801년에는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에만 1,000개가 넘는 순환도서관이 들어섰다. 인구 2,000명이 넘는 지역에는 대체로 있었던 셈이다. 각 순환도서관의 장서는 평균 5천 권 정도였지만, 작을 경우는 500여 권, 규모가 큰 경우 7천여 권까지 소장하기도 했다. 1770년에는 출판물의 40퍼센트를 순환도서관에서 사갈 만큼 순환도서관은 출판사에 있어 확실하면서도 안정적인 판매처였다. 분야별로 보았을 때 순환도서관이 보유한 장서의 약 20퍼센트가 소설이었다. 순환도서관은 특히 중산층 여성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책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지는 북클럽이나 순환도서관 둘 중 하나였다. 주로 남성은 정치·경제·종교·철학 분야의 책을 구매하는 북클럽을 선호했고, 여성은 소설을 많이 소장한 순환도서관으로 몰렸다. 순환도서관은 소설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오만과 편견》에 순환도서관을 등장시켰던 제인 오스틴도 연회비가 2기니(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0-40만 원)인 베이싱스토크(Basingstoke)의 미시즈 마틴 순환도서관 회원이었다.
--- 「우리에겐 순환도서관이 필요해」 중에서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니?” 초등학생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묻다니. 이게 현실성 있는 질문인가? 아이들은 단순히 내용만 보고 책을 고르지 않나? (…) 예전에 스토리 타임에서 책을 읽어주던 이들이 글과 그림 작가를 항상 같이 소개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씨비비즈 베드타임 스토리는 공식성을 갖춰야 하는 방송국이니 열외로 치더라도 각종 놀이 모임의 스토리 타임만 해도 그랬다. 나는 책을 읽어줄 때 제목만 읽고 바로 책장을 넘겨 본론으로 넘어갔던지라 그 모습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때 나는 ‘왜 책 표지를 읽는 데 시간을 쓰지?’라는 의구심을 품었다. ‘어차피 작가들 이름을 말해도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텐데’라며 아이를 얕잡아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어린이 책인데 굳이?’라고 생각하며 은연중에 아동 문학을 가볍게 여겼던 것인지 모르겠다. (…) 개인적 습관과 태도를 넘어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니?”라는 질문이 가능하려면 사회·경제적 조건도 갖추어져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소수의 유명한 작가 외에도 글을 꾸준히 발표하는 아동 문학 작가군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아동 문학 작가들이 작품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출판 시장과 궁극적으로 이를 소비할 아동 독자층이 탄탄해야 가능한 일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니?”라는 물음은 ‘작가-어린이 독자-출판 시장’을 잇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한 영국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 「듣기에서 읽기로」 중에서
조지 오웰은 노련한 서평 작가가 보일 행동을 예측한다. 다섯 권 중 세 권은 서평 작가가 전혀 모르는 분야였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작가와 독자의 원성을 듣지 않으려면 방주인이 적어도 50쪽 정도는 읽고 쓸 것이라고 본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빈 종이를 쳐다보지만 째깍거리는 시간이 주는 압박에 못 이겨 어느 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손가락을 놀릴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책” “매 페이지 기억할 만한 점” “각 장에서 다루어지는 특별한 가치들” 등등 진부하기 짝이 없는 수식어를 알맞은 자리에 기가 막히게 배치하고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좌악 본 후 마감 3분 전에 기적적으로 일을 끝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몇 시간 만에 모양새만 갖춘 채로 얼렁뚱땅 탄생하는 서평문의 현실을 가감 없이 밝힌 오웰은 서평이 필요한 책은 지극히 소수라고 말했다. (…) 에세이에서 오웰은 한때 책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시골 경매에서 혹여 여러 권을 싸게 사면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행복함을 느꼈다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했다. 18세기 무명 시인의 글, 잊힌 소설, 시효가 지난 지명 사전, 철 지난 여성 잡지 묶음을 사 모으는 괴팍한 취향도 가졌다고 썼다. 너무 피곤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소녀 취향에 맞는 소설을 싣는 《The Girl’s Own Paper》(1880-1956)를 읽었다고도 했다.
--- 「조지 오웰은 직업 서평가였다」 중에서
북클럽의 생사는 α가 결정한다. α란 책을 매개로 인간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효과로 모든 북클럽은 책+α를 추구한다. 가령 전쟁기에 α란 피난처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나오는 2차대전 시기 영국의 건지섬 주민들이 그랬다. 이들은 1940년 독일군이 섬을 점령한 이후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라디오는 모두 빼앗겼고 우체국이 문을 닫은 데 이어 전보용 케이블도 끊어졌다. 섬 안에서 모임을 열기도 불안했다. 점령군이 작성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단체만이 합법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점령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낸 지 첫 1년이 지났을 무렵, 다섯 명의 이웃은 새끼 돼지를 몰래 구워 먹는 위험한 행동을 감행한다. 영화에서 노릇노릇 구워진 통 갈비 자태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빛이 나고 오랜만에 맡는 고기 기름 냄새에 넋을 놓은 모습이지만 사실 고기만큼 사람과의 교류에 굶주렸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 놓고 이웃집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을 터다. 대화가 끊기질 않았던 그날 밤, 통금을 훌쩍 넘긴 이들은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독일군에 발각되고 만다. 북클럽이 있었다고 둘러댔지만 실체를 확인하겠다는 독일군의 엄포에 이들은 폐쇄된 동네 서점에 손전등을 들고 몰래 들어가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예이츠 등의 작품을 마구잡이로 가지고 나와 취향대로 나눠 가졌다. 북클럽의 존재를 증명한 후 모임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웃과의 만남이 주는 심적인 위안에 이들은 금요일 밤마다 책을 매개로 계속 만남을 이어간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처였던 북클럽은 생명력을 다했다. 그러자 섬사람들은 α를 바꾸어 북클럽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전쟁 극복과 치유라는 α로.
--- 「북클럽 성장기」 중에서
책 전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국 도서관은 몇 년 전부터 주제가 담긴 콘텐츠를 손수 개발해 왔다. 1차 세계 대전, 예술과 아나키즘 같은 묵직한 주제뿐 아니라 책 안의 마법, 옛 과학책 속 그림, 동물을 소재로 펴낸 책, 신화의 역사, 만화 이야기, 클래 식 및 대중음악 악보, 지도 이야기, 옛날 놀이와 장난감, 책 안의 사투리, 세계 종교 경전 등 출판물을 이용한 이야기를 주제로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한다. (…) 책과 정원은 영국스러운 아이템의 만남이다. 새롭다면 공동체 정원이다. 공동체 정원이란 지역 주민들이 꽃과 나무를 함께 가꾸며 사회적 연대를 도모하는 대안적 미래 공간이다. (…) 과연 정원이란 공간을 통해서 영국 도서관이 지역성을 회복하고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이 책과 인공지능으로,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이 쉽지 않다.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만든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딴 앨런 튜링 인스티튜트(Alen Turing Institute)를 도서관에 둘 것이라는 정도만 발표된 상태다. 영국 도서관이 미래로서 제시한 책, 갤러리, 정원, 그리고 인공지능. 이들은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킬까. 아마도 책은 퇴물보다는 보물이 될 것 같다.
--- 「영국 이야기 문화의 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