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 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지 않은 엽서를 찾아 나는 멀리 떠나네 이 세상에 없는 엽서를 찾아서 떠나네
--- 「먼 곳」 중에서
어떤 사랑도 기록할 수 없다면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각자 태워버린 편지는 되돌아올 수 없어도 우리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얼마만큼의 하늘이 있어서 전화해도 받을 수 없는지 쓰고 싶어요 편지지를 고르면서 제가 저녁 하늘의 그라비어를 보고 있을 때 당신이 있는 곳은 몇시인가요? 우리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는지 결혼하지 않고 사는지 그런 것은 쓸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랑 없이 사는 것이 대체 가능한 일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사랑이 지나갈 때 벚꽃처럼 보이는 재, 불타버린 편지가 어디까지 그뒤를 밟다가 부서져 흙이 되는지 흙이 되어 꽃이 되는지 쓰고 싶어요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 「불타버린 편지」 중에서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꿈틀대는 내장을 담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도 하얗게 하얗게 쓸어안는 게 중요하다고 눈 오는 밤의 봉인이 중요하다고 속여본다 속아주려느냐 조카야, 이것은 너만 속이려는 게 아니란다
--- 「라플란드」 중에서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
사랑의 폐광에서 내가 채굴한 당신 이름, 날카로운 펜으로 새긴 문신
나의 첫 줄, 첫 줄이자 마지막 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검지로 문질러보네
아, 익숙해지지 않는 질감의 고통
--- 「사랑의 폐광」 중에서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네 애인은 네게 그 편지를 읽어준다 내 사랑을 너는 그의 목소리로 듣고 그도 내 사랑을 자기 목소리로 듣는다 푸른 보석 안에서 흰 구름 흐르기 시작한다.
--- 「구름의 뉘앙스」 중에서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의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라플란드의 집배원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당신 혀의 무수한 미뢰들, 하나하나 벙그는 말의 꽃봉오리들
--- 「기대」 중에서
한번도 편지를 불태워보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새까만 어둠으로 앉은 남자가 방금 몸살을 하며 빠져나온 추문(醜聞)의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자기의 허물을 몰래 불태우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 「허물」 중에서
우리가 저마다 홀로 길을 떠나야 해서 밤마다 서러운 소리를 해도, 홀로라는 것은 언제나 둘을 부르는 것이어서 아주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길 위에는 만남이 있고 그 만남 끝에는 먼지와 검불, 재가 내려와 덮이는 온전히 시간이라고도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차원이 있고, 그 만남 끝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있고 그 말은 아리고 쓰라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에는 언제나 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지나온 집을 떠올리며 나라는 것은 없고 나라는 것은 단지 과정이구나, 나는 머물 집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북받치는 것이 있고……
---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
시간이 저를 비눗방울 불듯 불어댔어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숨…… 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어요 노란 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 흘리는 소녀, 피 흘리는 양곤, 블루 사이공, 꽃잎 꽃잎 사랑의 시간,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
--- 「책갈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