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하고 쾌적한 이동 경험은 도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제아무리 고급 승용차라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도시는 혼잡하고, 시끄럽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니. 거대도시에서는 조용한 새벽을 달리는 도로조차 때로는 밀리기도 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이 길을 막거나 아예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자가용으로 탱크를 몰고 다닌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기능 고장으로 탱크가 멈춰 서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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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지옥, 수강 신청 전쟁, 기차표 오픈런, 출퇴근 지옥, 소아과오픈런, 아파트 영끌, 생존을 위한 극심한 투쟁, 여기저기서 하이빔과 경적이 난무하는 정체 구간 ……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다들 지쳐 있다. 이 도로에 갇힌 이들은 모두 어디로 향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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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동의 편리함을 대가로 매우 비싼 집값을 치르기도 하고, 이동이라는 이슈로 선거 결과가 좌우되기도 한다. 사람의 이동을 결정하는 것이 이동성이다. 이동에 몸을 쓰지 않으면 이동성을 잃고, 잃어버린 이동성은 자립에서 멀어진 삶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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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관점에서 사람의 이동성은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과 발달, 노화와 노쇠, 죽음은 이동성의 궤적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 (…) 이동성은 신체, 인지, 정신·사회적 기능 전반과 환경적 요인의 상호 작용으로 결정된다. (…) 이동성 장애를 경험하면 인지 기능이나 정서 등에는 문제가 없어도 원활한 이동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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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활용은 신체 활동의 증가와 관련 있으며, 잠재적으로 만성질환에 예방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외국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고된 바 있다. 이동 자체를 들여다본 구체적 연구는 없지만, 만성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대사 체계를 악화시켜 복부 비만을 낳고, 식욕을 증가시키는 등 여러 가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질병과 노쇠는 이동성을 감소시키고, 다시 이동성의 감소는 질병과 노쇠를 불러온다는 미국에서의 연구도 많다. 복잡계처럼 서로 엉켜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건강한 성인, 노인, 장애인을 비롯한 모두에게 더 나은 대중교통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은 수백만 한국인들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당장은 돈이 되지 않겠지만, 길게는 큰돈을 아끼는 일이다. 이동성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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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 더 쉽고 빠르게 뭔가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그대로 나타난다. 교통 법규 3대 위반 행위로 ‘꼬리 물기(신호 위반)’, ‘끼어들기’, ‘지정 차로 위반’을 꼽는다. 모두 구조적으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옥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더 크고 무섭게 생긴 자동차가 작은 차를 밀어붙이거나 제압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진다. 대형차, SUV형 차량 선호가 극에 달하는 이러한 심리는 고가 차량의 판매로 더 많은 영업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완성차 업계의 이익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도로에 차량이 적을 때만 운전의 자유를 얻듯이, 대형 차량의 비교우위는 내 차가 상대적으로 클 때만 확보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통지옥에서는 ‘거함거포주의’의 악순환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 이어졌던 전함 대형화의 악순환을 뜻하는 ‘거함거포주의’는 관통력 좋은 적국의 신대형 함포를 막기 위해 우리편 전함 규모를 더 키우는 동시에, 될수록 거대한 함포를 장착하고자 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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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의 많은 덕목은 이처럼 효율을 높여야만 현실이 될 수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에너지 효율도 그렇고, 이용객들에게 낮은 운임을, 납세자에게 가능한 한 적은 부담을 끼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효율만 신경 쓰다가 자칫 승객이 적다고 지선망을 죽여 네트워크를 약화시키고, 주말마다 예매 전쟁을 유발해 사람들이 정작 필요로 할 때 탈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그러한 군살을 뺀답시고 무턱대고 굶다가 근육을 잃고 체력도 잃게 되는 것 같은 ‘제살 깎아 먹기’가 발생하면 곤란하다.
승용차는 이런 효율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재무적 효율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망의 포괄 범위를 넓혀, 궁극적으로는 도시와 우리 삶의 장기적 효율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거대도시 철도망을 더 잘 활용하려면, 효율의 중층적인 의미를 더욱 상세히 반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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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서울에는 더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선다고 한다. 화려한 고층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이들은 ‘거함거포형’ SUV로 직행할 것이다. 근육은 부족하고, 지방은 과잉인 몸으로. 실제로 미국의 사고 데이터를 분석한 대규모 관찰 연구에서 더 높은 체질량 지수를 가진 사람들은 소형 승용차보다는 큰 SUV를 탈 가능성이 높음을 제시했다.
신체 활동은 따로 ‘운동’으로 해야만 하는 거대도시.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번쩍이는 거대도시의 설계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가속 노화의 악순환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 p.104
여행의 소비가 일으키는 탄소 배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구글 플라이트를 검색하면, 서울에서 뉴올리언즈를 왕복하는 여정은 이코노미 승객 1인당 대략 700~1000킬로그램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선진국 시민이 평균적으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환산 온실가스가 연간 8톤 정도 되는데 이를 연간 2톤 정도로 당장 감축할 수 있다면, 2100년까지 전 지구의 기온 상승을 평균 섭씨 2도 정도로 방어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p.119~129
거대한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라 거대도시인의 삶이 굳이 먼 거리를 도로와 철도를 활용해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조금씩 바뀌고, 대중교통의 경험도 점차 나아지면 자동차 리듀스테리언은 자동차 없는 삶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 인구 감소에 기대어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기를 관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온실가스 예산은 그리 풍족하지 않다.
지금부터 20년간, 거대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급격하게 달라질 것이다. 그 숨가쁜 변화 속에서 거대도시의 이동을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구현해내는지가 우리의 미래 건강과 행복, 그리고 넷제로Net -Zero의 달성까지도 좌우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더해야 할 것들과 빼야 할 것들은 이제 더없이 명백하다. 개인과 사회 모두가 바뀌는 일만 남았다.
--- p.198~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