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란 미학적으로는 시적 순간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시적 순간은 여백 현상으로 열리는 장소에서 일어난다. 만남은 자연이나 인간이나 사건을 포함한 타자와의 대면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열림의 장을 두고 말함이다. 작가는 만남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작품을 만들어 장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만남은 때때로 웃음이기도 하고 침묵이기도 하고, 언어와 대상을 넘어선 차원의 터뜨림이다. _47쪽
완전히 폐쇄적이고 내적으로 닫힌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과 작가가 생각하는 것의 엉거주춤한 관계에서 여러 암시를 줄 수 있는 것을 공간적(장소성)이나 시간적(시간성)으로 표현하려는 것에서 모노하가 형성되었습니다. 인간중심적인 산업사회 비판으로부터 태어난 모노하는 ‘만들어진 것만이 세계라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만들어 포화 상태에 있는 지구와 관련하여 ‘만드는 것에 대한 환상’을 다시금 생각해보자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물건을 덜 가공하거나 덜 만든다는 것을 끄집어내서 시간이나 공간과 관련시키며, 이런 방식으로 예술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런 데서 출발한 것이 모노하입니다. 강요된 인간의 개념 작용을 가지고 세계를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만들지 않는 부분이 도입되고 트릭도 사용됩니다. _60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회화나 조각은 일종의 재제시로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점들이 모여서 여러 형태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것을 철저히 추려 정리하고 정제시켜서 극히 일부만 내 손을 거치도록 하여 숨결이 느껴지게 재제시하는 작업입니다. 철판과 돌을 어우르는 조각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어디나 자욱이 널려 있는 수많은 사물들의 연관 가운데, 어떤 만남을 통하여 ‘요거다’ 하고 느껴지는 광경을 끄집어내어 철판과 돌로 수렴시키고 단순화하여 울림을 줄 수 있게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창조가 아니라, 있던 것을 다시 제시하는 것으로 일종의 ‘괄호 넣기epoche’(판단중지)입니다. 그럼으로써 현실이 다시 보입니다. 예술은 그래서 ‘창조’가 아니라, 이러한 ‘재제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_72쪽
일반적, 통속적인 타자론은 저기 있는 ‘남이 타자다’라고 말합니다. 엄밀하게 볼 때 ‘타자’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어떤 관계에 있을 때 타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는 타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옆 사람이 타자라고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너무나 투명하게 느껴져서 자타 구별이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 사람이 가진 나이, 몸무게, 색깔, 성격 등을 다 아는데도 불투명할 때가 있거든요. 타자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발생하면서 생겨납니다. 내 발상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모순된다는 겁니다. 존재는 모순이지, 존재는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아니고 대화의 상대인 것입니다. 나에게 ‘관계론relatiologie’은 있지만 ‘존재론ontologie’은 없습니다. _74쪽
내 최근 그림은 캔버스나 벽에 아주 조금밖에 터치를 안 합니다. 아주 작은 이 터치에 의해서 그림이 걸려 있는 공간에 어떤 울림이 퍼지거나, 공기가 밀도를 가져서 공간이 열리면 그것은 환한 장소가 됩니다. 물론 여기서 장소라는 것은 시간성을 포함한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순간’이 장소입니다. 그런데 점 하나만이 보인다면 그것은 실패작입니다. 그것이 위치라든지, 뭔가 억양이라든지, 점이 가지는 힘, 에너지라든지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나의 조각, 그림, 글은 하나의 계기나 힌트이지 그 자체는 아니에요. 그래서 내 시집 후기에도 “내가 쓰는 것은 시 자체는 아니다. 시를 유발시키는 말일 뿐이다”라고 썼는데, 글뿐만 아니라 그림, 조각 다 그래요. _142~143쪽
예를 들면 나의 작업은 재료를 양적으로 아끼며 많은 것을 쓰지 않습니다. 동시에 주변을 다 허용하거나 인정하면서 내가 하는 일을 극소화합니다. 줄이고, 가능한 한 덜 만들고, 만들지 않은 부분과 콘택트를 하면서 작업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만드는 대량생산, 전적으로 인간이 만드는 이러한 상태는 문명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공해도 심각해지고, 자원도 다 써 없애고, 커다란 문제입니다.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몽땅 다 만드는 것, 몽땅 다 그리는 것에서 가능하면 덜 만들고 덜 그리고, 그리지 않는 부분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 내 기본자세입니다. 그 결과, 간단한 그림과 만들지 않은 조각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 인간적인 윤리성, 행위, 표현은 축소화, 정제화하면서 자연이나 우주와 같이 건드릴 수 없는 주변에 대해서는 좀 더 배려해야겠다는 입장에 서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_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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