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세계의 종말을 알리거나, 우리가 아는 세계를 구하거나 지속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나처럼 이 세계의 종말이 오고 있음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이든 우리가 시도할 가치 있는 과제에 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평선 너머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으며,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바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근대성의 기준과 시스템에 따라 현실적이거나 중요하다고 평가했던 것들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은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나는 기후 변화에 관한 논의가 더 넓고 깊은 대화로 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 몇 년 동안 나는 기후 변화를 해결하거나 관리함으로써 기존의 진보 곡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후 변화를 우리의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는 어두운 지식으로 여겼다. 또한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 우리의 삶이 추구했던 궤도, 우리가 갖고 있다고 믿었던 권리, 우리가 태어나 속하게 된 세계와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에 관한 가정을 불태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근대성의 어두운 면을 경험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후 변화는 근대성의 빛나는 약속들이 처음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배가 곧 침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2장. 우리가 처한 곤경의 정체」 중에서
나는 달갑지 않은 질문을 하며 형식적인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가치 있는 역할을 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이미 모두 닫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오랜 기후 변화 논의 과정에서 나눴던 가장 중요한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았다. 또한 우리의 논의가 가장 진실하다고 느꼈던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어떤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3장. 나를 멈추게 한 네 개의 경험」 중에서
지금의 위기를 하나의 불운으로만 여긴다면 늘 임기응변식 수단으로 문제를 보완하면서 기존의 방식을 지속할 것이다. 위기의 원인을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찾는다면 똑같은 수단을 이용해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지금의 길이 막다른 방향임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찾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과학에 기반할 수 있지만, 과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질문은 관찰이나 측정, 계산을 통해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우리의 판단력이 필요하다. 이 질문을 회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모든 대응은 암묵적으로 이 답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명시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면 기후 위기를 단순히 불운으로만 여기고, 기술적인 해결책을 찾거나 생활방식을 조정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할 것이다.
--- 「5장.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중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과학의 위상이 대체로 허상일 뿐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후 과학 연구가 매우 진실하고, 이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실성 기준에 부합하며, 그들의 연구 결과를 진지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대 서구 사회가 스스로 내세우는 이야기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에 부여된 높은 위상은 사실 이념적 허울에 가깝다. 과학자들은 산업 사회의 이념적 체계를 제공하고, 그들의 연구소가 GDP에 기여할 경우에만 유용한 취급을 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가 그와 같은 사회적 목표(또는 생존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때면 그들의 목소리는 정상 회의장 밖에 모인 시위대의 목소리보다 높은 권위를 갖지 못한다.
--- 「9장. 권력에 이용당하는 과학」 중에서
근대성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근대적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경험한 다른 많은 생활방식을 배워 근대적 생활방식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미래 경로를 탐구하자는 제안은 생태근대주의 신봉자들에게 순진하거나, 유치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무시당할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의 타당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아직 발명되지 않은 기술 목록에 기초해 그리는 미래도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다. 확실히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제안은 모두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려고 노력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런 기적을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이다.
--- 「14장. 책임감 있는 어른들이 나설 때」 중에서
사람들이 지구의 곤경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국제회의에 앞서 배포된 선의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킹스노스 가족의 어항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다. ‘생태계 서비스’라는 언어를 예로 들어보자. 이 표현은 인간이 시스템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숫자로 표시해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폴이 묘사하는 살아 있는 강의 자유와 용이성을 포착하려는 시도인데, 여기서 핵심 단어는 ‘포착’이다. 강이라는 살아 있는 세계를 마치 기술적, 경제적 시스템인 것처럼 묘사하기 시작하면 결국 세계를 그런 시스템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즉, 인공지능의 지원에 힘입어 끊임없는 모니터링과 통제를 통해 생태적, 사회적 환경을 유지하는 행성 어항이 완성되는 셈이다.
--- 「20장. 거대한 어항이 되어버린 세상」 중에서
폴과 내가 ‘다크 마운틴 선언문’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기후 위기 문제를 완전히 포기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들은 ‘포기한다’는 것을 완전한 도덕적 실패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실, 나는 ‘포기’가 필수적인 단계, 즉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지금 필요한 행동과 앞으로 필요한 행동을 찾기 위한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모든 것처럼 여겨지는 무언가를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며, 그 결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이다.
--- 「23장. 포기의 결과로 다가올 새로운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