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회에서 ‘오직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 사상은 어느 군주나 어릴 때부터 배운다. 그러나 어느 군주도 ‘백성이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안정되고 튼튼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유는 첫째로 백성과 너무 동떨어져 살아 백성이 실제로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사람들인지 실감할 수가 없고, 둘째로 왜 민본이고, 왜 민본이 아니면 안 되는지를 특별히 깨우쳐주는 특별한 스승도, 백성의 실존을 가감 없이 말해주는 특별한 친구도,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_ [10만 양병론의 진위], 34쪽
역피라미드형인 만큼 군중에는 계통이 서지 않고, 계통이 서지 않는 만큼 명령도 제멋대로다. 방어사·병사·순변사·순찰사·도원수 등 제장들이 각기 권한을 장악해서 제각각 결단과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따를 줄을 모른다. 오직 태만하고 안일한 생각만 되풀이해서, 전진하고 싶으면 전진하고 퇴각하고 싶으면 제 마음대로 퇴각해버린다. 기회를 만들어 미리 시일을 정하고 만나기로 약정해도 제 날짜를 지키지 않고, 핑계는 반드시 다른 장수들에게 갖다 댄다.
결과는 불을 보듯 번연해서 무엇보다 장수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고, 오로지 각자가 흩어져 피해 달아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는다. 진격할 때도 함께 진격하지 못하고, 패해서 물러갈 때도 서로 구원해주지 않는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이 공을 이룰까 시기해서 견제하기까지 한다. _ [기이한 조선군], 120쪽
장수가 녹봉이 없이 병졸들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그 장수와 병졸의 군사 외적 상호관계는 어떤 유형이었을까. 이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두 가지 유형의 ‘수탈형태’를 자행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양민을 수탈하게 하는 행태이고, 다른 하나는 장수가 자기 병사를 직접 수탈하는 행태이다. 후자의 수탈은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지 않는 만큼 ‘합법적’으로 용인된다. _ [녹봉 없는 장수], 123쪽
원군으로 온 남의 나라 군대가 전쟁의 주군主軍이 되고, 조선 백성은 자기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성패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어떤 계책도 세우지 않고, 어떤 조치도 취할 의사가 없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 적과 맞닿아 진을 치고 있는 장수와 사졸들 모두가 전쟁의 성패를 명나라 조정의 처치에 맡겨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묵인하고 있다. 선조도 일찌감치 우리 군과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명군 장수들에게 넘겨주었다. _ [전쟁은 누가 맡는가], 147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언제나 급합니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지나고 나면 금방 해이해집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하고 내버려둡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중심부에 아직 있음에도 이러하다면, 만약 명나라 군대가 떠나버린다면 다시 믿을 곳이 없습니다.’ _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158쪽
예로부터 공론 없는 국가가 어찌 있겠습니까. 또 공론을 멸시하는 대신을 어찌 대신이라 하겠습니까. 이제 온 나라 사람이 그를 가리켜 권간이라 하는데도 그에게 나라 일을 맡기는 일이 또 어찌 있을 수 있겠나이까. 밝으신 임금님께서는 옳은 처분을 조속히 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_ [류성룡 물러나다], 339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