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문자가 형성되기 전에도 우리 인류는 다채로운 시각적 상징과 기억을 돕는 연상 기호를 사용해 정보를 저장했다. 암면 미술(rock art)은 보편적 상징들, 예컨대 인간을 형상화한 듯한 그림, 식물군과 동물군, 태양, 별과 혜성 및 말로 설명되지 않는 기하학적 무늬 등의 저장고다. 대부분 이 시각적 상징들은 물리적 세계에서 흔하디흔한 현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억을 돕는 연상 기호는 언어적 맥락에서도 사용되었다. 예컨대 매듭을 이용한 기록, 그림문자, 눈금이 새겨진 뼈와 막대기, 메시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막대기, 실을 조작해 음을 만들어내는 장치, 채색된 조약돌 등 다양한 물체가 말을 기억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수천 년 동안, 시각적 상징과 이런 연상 기호는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서 더욱더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 둘이 합쳐져서 하나의 ‘시각적 연상 기호’(graphic mnemonics)가 되었다.
---「1장 - 새김눈에서 서판으로」중에서
이집트 상형문자가 지닌 또 하나의 매력적인 특징은 한정사, 곧 기호 식별자가 쓰였다는 데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한정사라는 기호 식별자는 다른 문자 체계에서도 나타난다.) 한정사는 의미가 아니라 소리를 식별한다는 점에서 표음적 보완재와 확연히 달랐다. 한정사는 표음문자, 곧 소리 기호의 뒤에 달라붙는 표어문자인 단어 기호였다. 영어에서 동음이의어 Bill과 bill처럼, 특히 단어의 소리가 모호성을 띨 때 원하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게 할 목적에서 한정사가 더해졌다. 한정사는 가급적 명확해야 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한정사는 표어문자보다 그림문자였다.
---「2장 - 말하는 그림」중에서
나중에 청동 시대 중반에 생겨난 가나안 원형 알파벳도 그림문자, 선형문자, 자음문자였고, 기호 하나가 자음 하나를 전달했다. 이집트와 바빌론, 아나톨리아와 에게해의 교역 중심지에서 새롭게 고안된 문자는 쓰기에 간단하고 탄력적이어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발달했다. 이집트 필경사가 그 알파벳을 증류해낸 주역이라면, 가나안 필경사는 그 알파벳을 널리 퍼뜨린 주역이다. 가나안에서 가장 오래된 알파벳문자는 이스라엘에서 발굴된 게셀 항아리(Gezer Jar)에 있고, 기원전 1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3장 - 말하는 문자 체계」중에서
그리스 알파벳의 목록은 처음부터 상당히 완성된 수준이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 문자로 글을 쓰는 작업은 꽤나 ‘원시적’이었다. 무척 오랫동안 표준화된 철자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문자와 대문자를 구분하지 않았고, 문장 부호와 띄어쓰기도 없었다. 또 지역마다 고유한 관례를 따랐는데, 심지어 자체적으로 고안한 글자를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초기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은 셈어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또 ‘황소가 밭갈이하듯이’(boustrophedon) 줄이 바뀔 때마다 글을 쓰는 방향도 달라졌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경, 대부분의 필경사는 줄바뀜에 개의치 않고 항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방법을 선호했다. 결국 이 방법이 다른 모든 방법을 대체했다.
---「4장 -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중에서
세종은 1446년의 포고령에서 이렇게 썼다. “[한글]은 무성음과 유성음을 명확히 구분하고, 음악과 노래를 기록할 수 있다. [한글]은 실용적으로 사용하기에 좋다. 바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수탉이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도 [한글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이 말은 거의 사실이다. 한글 자음은 다섯 곳의 조음점, 곧 양순음(입술), 치음(이), 치경음(잇몸), 연구개음(여린 입천장), 성문음(목구멍)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세 모음의 모양은 ‘형이상학적으로’ 하늘(둥근 점)과 땅(가로선)과 사람(세로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새로운 문자 체계를 철학적으로 합리화함으로써, 한글 체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중국식 개념화를 요구하던 한국 학자들을 표면적으로 만족시켜주었다. 따라서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시각적으로도 구분되는 동시에 개념적으로도 구분되었다.
---「5장 - 동아시아 문자의 재탄생」중에서
메소아메리카에 완전한 문자가 존재했다는 첫 증거는 사포테카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오악사카계곡에서 테우안테펙 지협까지, 멕시코 남부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한 종족이다. 기원전 600년경, 오악사카계곡의 몬테 알반 보루와 인근 중심지들의 지역 지도자들은 승리를 널리 알리고, 포로를 사로잡아 고문하고 제물로 바친다는 걸 자랑하는 석조 기념물을 세웠다. 특히 그 기념물에 패배한 경쟁자 및 그 종족의 이름, 그 경쟁자가 전쟁에 패하거나 제물로 바쳐진 날짜를 기록했다는 게 주목된다. 사포테카 필경사는 토종 식물로 만든 종이에 색을 더해가며 글을 썼고, 식민 시대에는 스페인에서 수입한 종이도 사용했다. 그들이 남긴 문헌 중에는 (십중팔구 공물을 기록한 듯한) 회계 장부, 족보 및 사포테카 영역을 표시한 지도가 있다. 대부분의 비문은 ‘특정한 전사가 특정한 날에 특정한 도시에서 사로잡은 포로의 수’를 기록한 듯하다.
---「6장 -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중에서
고대에 선호되던 필기구 파피루스는 너무 비쌌다. 따라서 극소수만이 글로 쓰인 책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긴 작품을 구입해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서기 2세기에 양피지가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게다가 양피지는 값이 싸서, 책의 생산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양피지는 수 세기 전부터 주변에 널려 있던 것이었다. 예컨대 기원전 190년, 소아시아(현재 튀르키예 서부) 페르가뭄 왕국의 통치자 에우메네스 2세(Eumenes II, 기원전 197~기원전 158 재위)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필적하는 도서관을 세우려고, 기술자들을 독려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얇게 펴서 건조하는 기법을 완벽하게 다듬게 했다. 이런 과정에 탄생한 최종 생산물의 명칭인 ‘양피지’(parchment)는 발명된 장소 ‘페르가뭄’(Pergamum)에서 따온 것이다.
---「7장 - 양피지 키보드」중에서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개인적인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행위 자체가 우울감을 떨쳐내고, 면역 체계를 강화하고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글로 ‘영혼의 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태양계를 넘어간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는 지구의 컴퓨터에서 문자로 받은 명령에 응답한다. 우리가 기존의 한계를 넘어 모험을 시작할 때, 문자는 불완전하더라도 인간이란 종을 표현하는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생각이 있었다는 흔적을 인공물에 남기려는 충동은 현재의 우리만 아니라,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우리 선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자가 다양한 형태로 인류에게 계속 경이로운 도움을 준다면 ‘신인류’(新人類)를 규정하고 만들어갈 것이다. 미래에 문자가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중심이 되고, 힘을 주며 기억하게 해준다. 약 4,000년 전 이집트의 한 필경사가 말했듯이 “사람이 죽으면 몸뚱이는 흙이 되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흙먼지로 부스러진다. 그를 기억에 남게 해주는 것은 문자다.”
---「8장 - 문자의 미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