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오천축국전』의 내용
‘오천축을 다녀온 기록’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 중국식 옛 이름이다. 오천축은 인도를 동서남북과 중간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합쳐 부른 이름이다. 그래서 ‘왕오천축국전’은 ‘오천축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앞뒤가 잘려나간 현존 여행기에는 중천축에서 시작하여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과 인도의 서쪽에 있던 대식국(大食國, 아랍)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몇몇 호국(胡國) 주위를 지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 영토인 쿠차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혜초가 직접 보거나 전해들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나라를 단위로 서술되어 있고, 출발한 나라에서 목적한 나라로 가는 방향과 걸리는 시간, 왕성(王城, 수도)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 음식과 의상, 풍습, 언어, 종교 등에 대해 간결하지만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 『왕오천축국전』의 가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우리 책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후반(혹은 9세기 초) 황마지에 쓰인 필사본 그대로 보존되어왔기 때문에 현존하는 우리의 최초 기행문이자 가장 오래된 책이다. 국보급 진서이자 불후의 고전이라 할 수 있으며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또 중세 세계사 연구에서 귀중한 사료가 된다. 혜초에 앞서 인도를 여행했던 법현의 『불국기』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비해 서술은 간략하나 사료적 가치는 뒤지지 않는다.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정치, 문화, 풍습, 종교 등 다방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고 특히 그 시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혜초는 최초로 아랍을 ‘대식’이라 명명했고 한(漢) 문명권 내에서 처음으로 아랍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했다. 불공의 제자를 대표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쓸 정도로 시재(詩才)였던 혜초의 시 다섯 수를 포함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도 상당하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지명을 의역하지 않고 음역한 점에서 언어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5.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
『왕오천축국전』이 외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듯이 그에 대한 연구도 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펠리오가 북경에서 『왕오천축국전』을 공개한 후 이것이 학계에 알려진 계기는 1909년 중국 학자 나진옥(羅振玉)이 『돈황석실유서』에 수록하면서이다. 1910년 후지타 도하치(藤田豊八)는 『혜초왕오천축국전전석』을 북경에서 한문으로 간행하였고, 1915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는 혜초가 신라 출신이라는 것을 밝혔다. 1938년 독일 학자 푹스(Walter Fuchs)가 최초로 외국어(독일어)이자 현대어로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외국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경우, 1986년 구와야마 쇼신(桑山正進)을 비롯한 19명의 국내외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연구반을 조직하여 5년 동안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1992년 기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를 펴냈다.
혜초의 고향인 한국에서도 뒤늦게나마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1934년에 최남선이 『신정삼국유사』에서 간단한 해제와 함께 여행기의 본문을 최초로 소개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근래에는 고병익 교수의 논저와 문화관광부가 혜초를 ‘1999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기념으로 추진된 학술세미나에 의해 연구가 진작되었다. 지금까지 나온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양한승의 『왕오천축국전: 혜초기행문』(1961), 이석호의 『왕오천축국전』(1970), 김규성의 「왕오천축국전」(『한국의 사상 대전집』, 1973), 한정섭의 『왕오천축국전』(1986), 정병삼의 「왕오천축국전 번역문」(『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1999), 북한의 김찬순이 번역한 「왕오천축국전」(『조선고전문학선집』, 1990) 등이 있다.
1. 발견 과정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 돈황석굴에서 1200여 년간 잠들어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하다
중국 북서쪽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도시 돈황(敦煌)은 한 무제 때 개척된 이래 원대까지 줄곧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자 동서문물의 교류와 불교의 동전(東傳)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2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 절벽에 천불동(千佛洞) 혹은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불리는 돈황석굴이 있다. 4세기 승려 낙준(樂?)에 의해 조영되기 시작한 이 석굴사원에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왕원록(王圓?)이라는 도사(道士)가 1900년 어느 봄날 석굴 16동을 수리하다가 모래벽 너머로 수많은 경전 사본이 소장된 17동, 곧 장경동(藏經洞)을 발견한 것이다. 장경동은 11세기 서하(西夏)의 침입 때 몰래 봉(封)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발견된 뒤에도 한동안 방치되어오던 장경동은 20세기 초 중앙아시아의 침탈에 관심을 돌린 서구 열강들의 눈에 띄면서 약탈의 대상이 된다. 1908년 3월 이곳에 파견된 탐험가 중 한 명이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lliot)는 제목도 저자명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는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한다. 1200여 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순간이었다.
정체불명의 두루마리가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것이 밝혀지다
펠리오가 발견했을 당시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가고 없는 상태의 필사본 두루마리였다. 분량은 227행에 한 행이 30자 내외로 총 육천여 자 남짓이었고, 크기는 세로가 28.5cm이고 가로는 약 42cm인 종이 아홉 장을 이어 붙여 358cm나 되었다. 이 두루마리의 실체를 밝혀낸 사람 역시 펠리오다. 펠리오는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기 전부터 당나라 승려 혜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100권, 783∼810 편찬)를 통해서 이 여행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체경음의』는 불교 관련 서적에 나오는 어려운 어휘나 고유 명사에 간략한 주석을 붙인 일종의 어휘 주석집이다. 펠리오는 『일체경음의』 제100권 「혜초왕오천축국전」편에 주석된 85개의 어휘 중 일부가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에 있는 어휘와 일치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이 두루마리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2. 혜초의 생애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에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다
혜초에 관해 처음에는 인도에서 온 밀교승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의 제자라고만 알려져 있다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신라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불공이 입적할 때 남긴 유서가 수록된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辦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을 통해서였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라는 자작시를 통해 혜초 자신이 『왕오천축국전』 속에 자신의 고향이 계림, 즉 신라인 것을 밝힌 대목도 있다. 하지만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지 백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 간단한 약력 외에는 정확한 생몰년대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704년경 신라에서 태어난 혜초는 719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갔다. 그 후 광주(廣州)에서, 남인도에서 온 밀교승이자 불공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의 문하에 들어갔다. 723년 금강지의 권유로 배를 타고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그 후 약 4년 동안 인도를 비롯한 서역 여러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고 727년 11월 초 당시 안서(安西) 도호부 소재지인 구자(쿠차)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당으로 돌아온 혜초는 733년부터 금강지가 입적한 741년까지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밀교 경전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하면서 필수(筆受)와 한역 작업도 했다. 773년 10월부터는 장안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불공의 강의를 받았다. 774년 5월 불공이 입적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도 작성하였다. 대종(代宗) 때는 가뭄이 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지어 올렸다. 780년 4월 15일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5월 5일까지 20일간 앞의 경전 『대승유가…』을 재록(再錄)하는 등,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밀교 연구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