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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문명기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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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4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514쪽 | 872g | 152*223*35mm
ISBN13 9788956250250
ISBN10 8956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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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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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석에서

<가장 원문의 뜻에 가깝고 정확한 번역>

역주자는 기존에 나온 국내외 『왕오천축국전』 번역서와 연구서를 비교하고 그 중에서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련 서적과 그 시기 그 지역의 상황을 근거로 원문을 복원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번역을 시도한다.

이 문장 중 ‘석(石)’자 앞의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와 또 같은 글자인 ‘오일(五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서 논란거리이다. ‘석’자 앞의 글자를 ‘오(五)’자로 보는 견해(藤, 12a; F, 459; 羽, 613; 李, 96)와 ‘오일(五一)’자로 보는 견해(Y, 41, 83; 鄭, 105)가 있는가 하면, 특이하게도 ‘일(一)’자로만 보는 학자(張, 28)도 있다. ‘오’자로 보는 학자들은 예외 없이 ‘다섯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였다. ‘오일’자로 보는 경우에는 ‘다섯 섬 중 한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기도 한다(桑, 31). 이색적인 것은 ‘오일’로 써놓고도 ‘다섯 섬을’로 옮겨 놓은 경우다(鄭, 105, 116). 그러나 당시 인도의 지세가 수확의 6분의 1을 공납하는 세제임을 감안할 때, ‘오일’로 인정하고 ‘땅에서 나는 곡식의 다섯 섬은 거두어들이고 한 섬은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171∼172쪽에서)

<정수일 선생만이 달 수 있는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

혜초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습관이나 근친혼, 일처다부제와 같이 서역의 풍습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 역주자는 주석에서 부연 설명을 해준다.

유목 생활 유습으로 인해 아랍인들은 자고로 맨손(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관행이다. 간혹 국 같은 것을 먹기 위해 숟가락은 사용하나, 한(漢) 문명권 사람들처럼 젓가락〔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짐작하건대 혜초는 꼬치구이를 즐기는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꼬챙이 같은 것을 젓가락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대식인들이 수저를 쓰는 것이 그에게 ‘퍽 흉하게 보였던’ 것이다. ---(366쪽에서)

혜초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는 ‘최근친혼(最近親婚)’을 ‘대단히 고약한 풍속(極惡風俗)’이라고 질타한다. 최근친혼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신봉자들을 비롯해 일부 민족들 속에서도 유행한 일종의 혼인 제도이다. 최근친혼을 비롯한 근친혼은 자고로 여러 민족들 속에서 혈통이나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혼인 비용에 의한 재화의 족외 유출을 방지하며 여자의 사향심을 달래기 위함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존재해왔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발단이 된 이 혼인 제도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인데, 그는 역작 『역사(Historia)』 제9권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Cyrus)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에 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캄비세스 이전까지는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는 관습이 페르시아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캄비세스는 자기의 여형제 중 한 명을 사모하여 구애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궁전 법관을 불러다가 여형제의 취처(娶妻)를 인정할 수 있는 법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왕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법관은 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왕자의 미움도 받지 않을 만한 묘안을 찾아내야 했다. 생각 끝에 법관은 여형제와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은 없지만, 왕에게는 원하는 대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타면법(他面法)도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자는 그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다른 여형제도 아내로 맞이했다. ---(389쪽에서)

‘공취일처(共娶一妻)’, 즉 여럿이 한 여인을 아내로 삼는 이른바 ‘일처다부(一妻多夫, polyandry)’도 일종의 혼인 제도로, 자고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성행하였다. 『수서』 「서역전」에 의하면 토화라국에서는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데, 방사(房事)가 있을 때면 방 밖에 옷을 걸어 표지하며 자식은 형에게 속한다. 그런가 하면 대월지 종족에 속하는 염달은 그 풍속이 돌궐과 비슷하여 형제가 아내 한 명을 취한다. 만일 형제가 없으면 처는 각이 하나인 모자를 쓰고 형제가 여럿이면 그 숫자만큼 각이 달린 모자를 쓴다(『위서』 「서역전」). ---(389∼39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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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문에서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습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

여행이나 여행기를 읽는 일의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풍물과 풍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혜초도 자기가 살던 곳의 풍습과 다른 이국땅의 낯선 풍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나라를 비롯해 오천축국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오천축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술이 취해서 서로 치고받는 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설령 마셨다 하더라도 의기나 좀 양양하고 기운이나 좀 얻을 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벌이는 자는 보지 못하였다. --- (229쪽 ‘신두고라국’절에서)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서캐와 이가 대단히 많은데, 이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 (263쪽 ‘토번국’절에서)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 --- (360쪽 ‘대식국’절에서)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토화라국을 비롯해 계빈국이나 범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373쪽 ‘호국’절에서 )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

혜초는 가는 곳마다 불교 사원과 승려의 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우세 정도, 이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전파 정도를 기록하여,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탑은) 가비야라국(迦毗耶羅國)에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타가 태어난 성이다. 거기서 무우수(無憂樹)는 봤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백성도 없다. --- (181쪽 ‘중천축국 4대탑’절에서)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더불어 행해진다. --- (197쪽 ‘남천축국’절에서)

<다섯 편의 시가 포함된 서정적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쁨이나 험난한 여로에서의 고단한 심정을 읊은 오언시 다섯 편을 포함하고 있어 서정적 여행기라 불린다. 남천축으로 가던 도중 읊은 다음의 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향수에 젖은 혜초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 (198쪽 남천축국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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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오천축국전』의 내용

‘오천축을 다녀온 기록’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 중국식 옛 이름이다. 오천축은 인도를 동서남북과 중간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합쳐 부른 이름이다. 그래서 ‘왕오천축국전’은 ‘오천축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앞뒤가 잘려나간 현존 여행기에는 중천축에서 시작하여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과 인도의 서쪽에 있던 대식국(大食國, 아랍)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몇몇 호국(胡國) 주위를 지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 영토인 쿠차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혜초가 직접 보거나 전해들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나라를 단위로 서술되어 있고, 출발한 나라에서 목적한 나라로 가는 방향과 걸리는 시간, 왕성(王城, 수도)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 음식과 의상, 풍습, 언어, 종교 등에 대해 간결하지만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 『왕오천축국전』의 가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우리 책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후반(혹은 9세기 초) 황마지에 쓰인 필사본 그대로 보존되어왔기 때문에 현존하는 우리의 최초 기행문이자 가장 오래된 책이다. 국보급 진서이자 불후의 고전이라 할 수 있으며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또 중세 세계사 연구에서 귀중한 사료가 된다. 혜초에 앞서 인도를 여행했던 법현의 『불국기』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비해 서술은 간략하나 사료적 가치는 뒤지지 않는다.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정치, 문화, 풍습, 종교 등 다방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고 특히 그 시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혜초는 최초로 아랍을 ‘대식’이라 명명했고 한(漢) 문명권 내에서 처음으로 아랍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했다. 불공의 제자를 대표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쓸 정도로 시재(詩才)였던 혜초의 시 다섯 수를 포함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도 상당하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지명을 의역하지 않고 음역한 점에서 언어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5.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

『왕오천축국전』이 외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듯이 그에 대한 연구도 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펠리오가 북경에서 『왕오천축국전』을 공개한 후 이것이 학계에 알려진 계기는 1909년 중국 학자 나진옥(羅振玉)이 『돈황석실유서』에 수록하면서이다. 1910년 후지타 도하치(藤田豊八)는 『혜초왕오천축국전전석』을 북경에서 한문으로 간행하였고, 1915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는 혜초가 신라 출신이라는 것을 밝혔다. 1938년 독일 학자 푹스(Walter Fuchs)가 최초로 외국어(독일어)이자 현대어로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외국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경우, 1986년 구와야마 쇼신(桑山正進)을 비롯한 19명의 국내외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연구반을 조직하여 5년 동안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1992년 기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를 펴냈다.
혜초의 고향인 한국에서도 뒤늦게나마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1934년에 최남선이 『신정삼국유사』에서 간단한 해제와 함께 여행기의 본문을 최초로 소개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근래에는 고병익 교수의 논저와 문화관광부가 혜초를 ‘1999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기념으로 추진된 학술세미나에 의해 연구가 진작되었다. 지금까지 나온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양한승의 『왕오천축국전: 혜초기행문』(1961), 이석호의 『왕오천축국전』(1970), 김규성의 「왕오천축국전」(『한국의 사상 대전집』, 1973), 한정섭의 『왕오천축국전』(1986), 정병삼의 「왕오천축국전 번역문」(『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1999), 북한의 김찬순이 번역한 「왕오천축국전」(『조선고전문학선집』, 1990) 등이 있다.
고문서 『왕오천축국전』은 어떤 것인가
1. 발견 과정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 돈황석굴에서 1200여 년간 잠들어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하다
중국 북서쪽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도시 돈황(敦煌)은 한 무제 때 개척된 이래 원대까지 줄곧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자 동서문물의 교류와 불교의 동전(東傳)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2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 절벽에 천불동(千佛洞) 혹은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불리는 돈황석굴이 있다. 4세기 승려 낙준(樂?)에 의해 조영되기 시작한 이 석굴사원에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왕원록(王圓?)이라는 도사(道士)가 1900년 어느 봄날 석굴 16동을 수리하다가 모래벽 너머로 수많은 경전 사본이 소장된 17동, 곧 장경동(藏經洞)을 발견한 것이다. 장경동은 11세기 서하(西夏)의 침입 때 몰래 봉(封)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발견된 뒤에도 한동안 방치되어오던 장경동은 20세기 초 중앙아시아의 침탈에 관심을 돌린 서구 열강들의 눈에 띄면서 약탈의 대상이 된다. 1908년 3월 이곳에 파견된 탐험가 중 한 명이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lliot)는 제목도 저자명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는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한다. 1200여 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순간이었다.

정체불명의 두루마리가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것이 밝혀지다
펠리오가 발견했을 당시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가고 없는 상태의 필사본 두루마리였다. 분량은 227행에 한 행이 30자 내외로 총 육천여 자 남짓이었고, 크기는 세로가 28.5cm이고 가로는 약 42cm인 종이 아홉 장을 이어 붙여 358cm나 되었다. 이 두루마리의 실체를 밝혀낸 사람 역시 펠리오다. 펠리오는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기 전부터 당나라 승려 혜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100권, 783∼810 편찬)를 통해서 이 여행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체경음의』는 불교 관련 서적에 나오는 어려운 어휘나 고유 명사에 간략한 주석을 붙인 일종의 어휘 주석집이다. 펠리오는 『일체경음의』 제100권 「혜초왕오천축국전」편에 주석된 85개의 어휘 중 일부가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에 있는 어휘와 일치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이 두루마리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2. 혜초의 생애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에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다
혜초에 관해 처음에는 인도에서 온 밀교승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의 제자라고만 알려져 있다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신라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불공이 입적할 때 남긴 유서가 수록된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辦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을 통해서였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라는 자작시를 통해 혜초 자신이 『왕오천축국전』 속에 자신의 고향이 계림, 즉 신라인 것을 밝힌 대목도 있다. 하지만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지 백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 간단한 약력 외에는 정확한 생몰년대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704년경 신라에서 태어난 혜초는 719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갔다. 그 후 광주(廣州)에서, 남인도에서 온 밀교승이자 불공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의 문하에 들어갔다. 723년 금강지의 권유로 배를 타고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그 후 약 4년 동안 인도를 비롯한 서역 여러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고 727년 11월 초 당시 안서(安西) 도호부 소재지인 구자(쿠차)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당으로 돌아온 혜초는 733년부터 금강지가 입적한 741년까지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밀교 경전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하면서 필수(筆受)와 한역 작업도 했다. 773년 10월부터는 장안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불공의 강의를 받았다. 774년 5월 불공이 입적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도 작성하였다. 대종(代宗) 때는 가뭄이 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지어 올렸다. 780년 4월 15일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5월 5일까지 20일간 앞의 경전 『대승유가…』을 재록(再錄)하는 등,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밀교 연구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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