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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언어감각, 투명한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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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나희덕
관심작가 알림신청羅喜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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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금이 간 항아리이면서 /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 손가락으로 퉁겨보면 /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 물을 담아보아도 괜찮다 // (……) // 너무나 짜서 맑아진 /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 그의 감식안 //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 시라는 항아리 ―「어떤 항아리」 중에서 나희덕 시인에게 시란 너무나 짜서 맑아지고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을 알아차리는 감식안을 가진 항아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에 함부로 뜨거운 고통과 슬픔을, 그 뜨거운 상징을 섣불리 쏟아붓지 않는다. 절망과 슬픔을, 고통을 말하면서도 그때조차 결코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삶의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요란하지 않게 그것을 직조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어느 날 시인을 찾아와 무심한 표정으로 쐐기풀 한 짐 내려놓고 가는 고통. 그 고통은 시인에게 말한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고통에게 1」) "그리하여 해도 영영 비칠 것 같지 않은 작은 방에 몸을 누인다."(「만삭의 슬픔」) 이처럼 "고통에 내용과 크기를 주어 상처를 만들기보다 그에 대한 해석을 침묵으로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안아들이는 방법, 그것이 나희덕의 사랑이며, 그 시"(황현산)이다. 모든 고통을 안아들이는, 항아리, 해도 비칠 것 같지 않은 작은 방은 이제 누에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는 슬픔과 고통을 안으로 쟁여 품었다가, 그것을 비단실 같은 시어로 뽑아내는 시인의 이미지이다. (……)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 뽑아낸다는 누에, /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락이 풀려나온 걸까 (……) ―「누에」 중에서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넣던 아버지, / 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 / 세상을 향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후로도 오랜 뒤였다 // 오늘밤, / 내 마음의 형광등 모두 꺼지고/ 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 / 내 속의 아버지가 나 대신 글을 쓰는 밤 / 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 / 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다 //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긴 편지를 나 역시도 쓰게 되는 것이다 ―「누에의 방」 중에서 그리하여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얼어붙은 호수」)고 소통되지 않음, 내 마음 가 닿지 않는 안타까움을 고백하면서도,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그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에 그는 시를 쓴다. 그리고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낮게 낮게 엎드려 살면서 입 속에 남은 단 한마디를 기다릴 것이다.(「포도밭처럼」) 한 알의 포도씨처럼 단단하게 영글어갈 그 한마디를.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 세상의 소리들을 잘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을 통해 누군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시인의 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