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었다. 쓰지 않은 날은 읽는 하루가 되었다. 공책 한 권에 소설 한 편씩. 하루에 한 장을 쓰고 나면 뿌듯한 마음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는 아니고 뭘 좀 먹고 기쁨을 만끽했다. 재능으로 밀고 나가기 보다 노력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꾸준히 쓰다 보면 늘겠지라는 마음으로 쓰다가도 어떤 날은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그럴 땐 소설을 읽었다. 내가 쓰려는 문장이 거기 있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자 그 하루도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소설은 그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도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다. 나를 봐달라고 말해도 돌아봐 주지 않는 소설은 아, 얄미운 사람이었다.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한 번만 만나달라고. 매일 밤 책상에 앉아 있느라 거북목이 된 내 등 뒤에 잠깐 와 달라고. 말해보았지만 소설 님은 와 주지 않았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이야기가 마구 떠오르면서 신나게 자판을 쳤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게 문장이 잘 써졌다. 이러다 한국 문학을 넘어서 세계 문학까지 평정하는 거 아냐, 자만에 빠지려다 저장하기에 실패했다. 날아갔다, 명작 소설이. 파일을 복구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좌절. 사랑하는 소설 님은 딱 한 번 방문하셨다가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한 달에 한 편 소설을 써댔던 시기가 있었다. 말 그대로 써댔다. 이런 것도 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난잡하고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제목이 이상하다, 비문이 많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줄거리다, 악평을 들은 날에는 집으로 달려와 문을 닫고 엉엉 울었다. 소설도 못 쓰는데 자존심은 세기만 한 꼴불견으로 살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서 읽었다.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한다. 독자에게 과거란 어떤 책을 읽지 않은 상태를 뜻하고, 미래란 어떤 책을 읽은 상태를 뜻하겠지. 그렇다면 독자에게 현재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상태다. 다들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독자인 셈이다.
(『소설가의 일』中에서, 김연수)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을 읽는 나는 독자다. 과거에 한 번 『소설가의 일』을 읽은 독자고 현재 두 번째 『소설가의 일』을 읽은 독자다. 나의 미래 역시 무언갈 읽는 독자로 남는다. 소설가가 되어서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쓰는 순간 소설가가 된다는 『소설가의 일』의 문장을 빌려오자면 나의 미래는 독자인 동시에 소설가가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나는 미래를 예언한다. 소설의 구성 단계인 발단을 쓰기 시작한 소설가다.
『소설가의 일』은 그가 방위병 시절 산 286컴퓨터로 첫 소설을 썼을 때를 중심으로 소설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다룬다. 탄생이라는 단어는 거창하다. 소설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질문한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소설가란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 않냐고. 그렇다. 소설을 쓰는 순간 그는 소설가가 된다. 소설을 쓰기 위해 단어를 찾고 문장을 쓰는 순간부터.
김연수는 뉴욕 제과점과 서울 식품 주변에 살던 평범한 학생이 문학에 눈을 뜬 시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단팥죽을 만드는 어머니 곁을 지키던 학생은 천문학과에 가기를 꿈꾸지만 소설의 뻔한 줄거리처럼 그는 좌절한다. 수학 시험을 보는 순간 불합격을 예감한다.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고 싶어 한 그는 영문학과에 들어가 소설, 철학, 신화 등 각종 책을 읽기 시작한다. 시와 소설을 쓴다. 영문학과에 다니는 학생은 읽기라는 수동적인 행위를 쓴다는 능동의 형태로 경로를 우회한다.
책을 좀 읽다 보면 드는 건방진 생각이 있다.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뻔뻔하고 허세 충만한 마음.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존재가 세상에는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 바로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한 소설가다. 신과 소설가의 공통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은 우주의 바깥에, 소설가는 소설의 바깥에. 어떻게 하면 소설의 신이 될 수 있는지 그간 궁금했다면, 여기 그 해답이 있다. 소설의 바깥에 있으면 된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기를.
공책과 연필만 있다면, 소설가는 어디에서든 글을 쓸 수 있다. 작업실 책상에 앉아서 쓸 수도 있고 동네 카페의 창가 자리나 방바닥에 엎드려서 쓸 수도 있다
(『소설가의 일』中에서, 김연수)
죽도록 사랑한 소설 님에게 버림받은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화가 난 나머지 컴퓨터를 날려 버리고 싶었던 화를 이야기와 문장을 다시 복구하는데 쓰기로 한다. 완벽한 문장이었는데 서사는 기똥찼는데 이런 생각과 싸우면서 기억을 떠올렸다. 뭐, 추측대로 대실패. 새우가 친구하자고 할 정도로 굽은 등으로 날아간 소설을 붙잡고 있는 나를 멀리서 또다른 내가 바라보게 되었다. 한심하고 한심했다. 어차피 가져가봤자 욕이나 먹을 소설이었는데 쿨하게 보내주지는 못할망정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꼴이라니.
시간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소설가는 되지 못하고 읽는 사람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폴 오스터는 자신이 열렬히 좋아하던 야구 선수를 만나 종이와 펜이 없어 사인을 받지 못한 일화를 들려주며 종이와 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인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그때부터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에 썼다고 한다. 사인과 맞바꾼 소설 쓰기의 시작이었다. 폴 오스터의 말 잘 듣는 팬으로서 가방에는 소설 님이 언제 찾아와 문장을 불러주고 이야기를 들려줄지 몰라 공책과 필통을 챙겨 다닌다.
쓰는 시간으로 불안한 한 시기를 건너왔다. 핍진성을 획득하기는커녕 우연으로 범벅된 소설이었다. 문장은 거칠고 인물들의 대화는 어색했다. 미래의 소설가는 현재의 독자다, 발로 써도 그보다 낫겠다고 무시하며 소설을 읽는 나다.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쓰는 순간과 읽는 시간을 가진 독자라면 그 누구라도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옆구리 팍팍 찔러가며 꼬드기는 응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