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사에 입사했다.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편집인 등 언론인으로 삼십여 년간 일했으며, 그 후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살인자의 가면무도회》로 한국추리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역사소설로는 《민회빈 강씨》와 《왕도와 신도》 등이 있다.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미디어MBA 과정을 이수, 경영학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구구구구……. 철령이 소리였다. 철령이는 영내의 군구(軍鳩)들과는 별도로 강씨 부인이 친정과 교신하기 위해 애지중지 기르는 흑비두리(비둘기)였다. 비두리의 이름을 철령이로 지은 건 험준한 철령을 넘어 오가기 때문이었다. 개경 등지에서 관북지방인 함경도로 가려면 회양, 고산, 용지원, 원산을 거쳐 반드시 철령(鐵嶺)을 넘어야만 했다. 오르막 40리, 내리막 40리에 아흔아홉 굽이. 구름도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고개지만 철령이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잘도 넘어 오갔다. 강씨 부인은 나흘 전, 정도전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봐달라는 서자를 묶어 철령이를 날려 보냈다. 그 답이 온 모양이었다. 계집종이 철령이가 가져온 서자를 강씨 부인에게 전했다. 눈에 익은 막내 오라버니의 글씨였다.
정도전은 목은(이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무(武)에도 관심이 많은 재사라 한다. 성격이 곧고 호방하나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며, 북원 사신 접대를 거절해 2년여 귀양살이를 했다는구나. 집권세력의 경계로 개경에 들어가진 못하고 김포에서 학숙을 열고 있는데 재생이 꽤 많다고 한다. 그의 외조모 출신이 비천해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은 좀 더딘 편이었다더구나. 그가 네 남편을 왜 찾아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외가의 신분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자 네 남편에 기대어 복직을 하거나 보다 출세를 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단 경계를 늦추지 말고 잘 살펴보는 게 좋겠다.
가계가 비천하다? 그렇다면 노림수가 따로 있다는 건가? 나라 걱정은 겉치레고 속내는 비천한 신분을 감싸줄 호위가 필요해서 접근한 것일 수 있다? --- p.38~39
“주군! 드디어 때가 오고 있습니다.” “때가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명을 받을 때가 온 것입니다. 명심하옵소서. 천명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하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느닷없이 그건 무슨 말이야?” “하늘이 누군가에게 대임(大任)을 맡길 땐 그 마음을 괴롭히고 배를 주리게 하고 몸을 고되게 해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시험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역경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그걸 잘 견뎌내셔야 하옵니다.” “이 사람아, 오늘따라 왜 이러는가?” “왕과 최영은 곧 요동을 치자고 할 것입니다.” --- p.113
“대사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왜?” “경계가 허술합니다.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주군의 양 어깨에 걸려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렇다고 우호세력만 있는 건 아닙니다. 왕도 적이고, 권문세족들도 적입니다. 최영 장군의 잔당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가 이리도 허술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 하겠는가. 괜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왕은 왕입니다. 여전히 보위에 있고, 숙위군과 근위내시들도 많습니다. 최영 장군의 잔당도 있고, 사병을 거느린 권문세족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서 이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럴 필요까지…….” “백 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쳐야 하는 법입니다. 마무리를 잘하려면 이미 걸어 온 구십 리와 남은 십 리 길을 똑같이 여길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 p.152
지독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키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 자신 때문에 죽고 귀양 간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찾아온 통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값싼 인정 때문에 대사를 망칠 순 없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인 자신의 미련함으로 죽고 다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죽어 지하에서 만나면 그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그 누구보다 이색 사부님과 동심우 정몽주의 모습이 유독 또렷하게 떠올랐다. 스승은 생존해 계시니 언젠가 찾아뵙고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정몽주는 죽어서나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열린 세상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수반했고, 자신이 얻은 성취감 또한 그 뿌리가 같았다. 백년 천년 갈 줄 알았던 그 성취감은 금방 잦아들고 그 자리를 차지한 허무감이 안겨준 씁쓸함을 곱씹으며 새삼 사람 한평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인임에게 밉보인 정도전은 결국 귀양길에 올랐다가 정몽주가 서장관으로 발탁할 때까지 9년여를 지방에서 떠돌며 지낸다. 유배가 풀리고도 정계로 들어오지 못한 채 곤궁한 백성의 삶 가까이 지내면서 개혁가의 삶을 궁리한다. 변방의 장수 이성계를 찾아가 그를 중앙 정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군신의 맹약을 맺으면서 역성혁명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이인임 일파의 권문세족과 최영, 이색을 비롯한 수구 세력의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하고, 모함과 숙청, 암살 기도가 이어지면서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