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호 콘텐츠를 재해석하고 구성하는 일을 하며 그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대학로 소극장에 올라가는 작은 연극들의 대본을 쓰다가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 청년 스토리텔링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다. 주요 구성 도서로는 [열정樂서], [응답하라 PD수첩], [안녕하세요] 등이 있다.
● 영화 [사도] 기획 노트 _ 영화 [사도] 시나리오 집필진 일동
● 소설 [사도] 스페셜 꼭지 ‘아버지와 아들’ _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아버지, 진정한 권위의 이름’ _ 김현철 (정신과 전문의)
아버지와 아들 / 곽금주(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사도의 경우도 영조가 아들에게 품은 질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조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아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고 결국 그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영조가 한 것과 같이 엄한 양육법을 심리학적으로 ‘독재적인 양육법authoritarian parenting’이라고 한다. 현 사회의 많은 부모들은 성과에 극도로 민감해서 자녀를 압박한다. 그런데 부모의 압박은 좀 더 지속 가능한 자녀들 자신의 동기를 발전하지 못하게 한다. 독재적인 양육법을 쓰는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규칙을 엄격히 따를 것을 기대하지만, 자녀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을 수 있다. 자녀가 무얼 원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지시를 따르기만을 바란다. 또한 자녀에게 규칙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자녀의 모든 활동에 관여하며 행동을 늘 감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부모 스스로는 그러는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이다. 이게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중심적인 육아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적인 양육법은 장단점이 있다. 장점으로는 자녀가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고, 또 아이를 성취 지향적으로 키워 실제로 자녀들이 성공을 거두게도 한다. 물론 그런 성취로 인해 자녀가 얼마나 행복할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기술을 가지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다. 심지어 불안이나 우울을 느끼게 되고 적응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심한 압박감으로 자신이 가진 능력 이하의 수행을 하기도 한다. 부모 중 특히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이런 독재적인 양육법을 적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아들에 대해 큰 기대를 품기 때문일 텐데, 하지만 그 기대가 지나쳐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결국 좌절과 실패를 맛보게 할 수도 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에는 기대가 컸던 만큼 자신이 바라는 아들로 키우기 위해 아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실망은 끝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그 어느 아비가 자식이 잘못되길 원하겠는가, 특히 죽이기까지 하겠는가. 아들이 자신의 분신分身이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장해야한다는 지나친 기대는 결국 아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 p.214
아버지, 진정한 권위의 이름 / 김현철(정신과 전문의) 멀지 않은 옛날, 한 왕자가 궁에서 정해준 옷을 입지 못하는 노이로제 증상에 빠진다. 베스티포비아vestiphobia, 현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의상 공포증에 걸린 것이다. 만약 정신질환이 발병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가 겪었던 베스티포비아는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잘 치료되지 않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전조였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모든 노이로제는 그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 그 왕자에게 의복이란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강요된 정체성이다. 자율의 생기를 뺏어 밀랍으로 굳히는 거푸집이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이름의 석고틀이다. 대대로 내려온 불가침의 관습에 처음으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굴복과 저항 사이에서 수만 번의 갈등이 교차하게 만든 옷고름이 되었다. 심연 속 갈등은 수면으로 올라와 자칫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모순적 감정들을 덮어준다.
그러나 아버지를 향한 인정욕의 좌절은 물론, 나를 만들어준 아버지로부터 받은 굴욕과 모멸감은 인간의 원초적인 분노, 차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자기애성 격노를 수반한다. 잊을 만하면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존속살인범죄는 부모와 자식의 혐오와 격노가 서로 만나 생긴 비극이다.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는, 불행하게도, 이런 전철을 밟아버렸다.
사도는 아버지 영조와 자신의 아들 이산이 친밀해지는 것을 보고 극단의 분노와 무력감에 빠진다.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무조건적 애정을 받기는커녕,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에 들지 않을 때면 만인들 앞에서 가차 없이 수모를 당하는 등 만성적인 정서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가던 차였다.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게 아버지의 주특기인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아들을 이용하는 아버지 영조의 이간질에 견딜 수 없는 분노는 물론, 부모답지 못한 태도에 이미 오래전부터 실망과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참고로 부모로부터 받은 실망에서 비롯된 독소毒素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살기殺氣 어린 강렬한 격노가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조는 이산을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궁궐 내에서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도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사도는 이 시점을 지나 점차 정서적 건강을 잃기 시작한다. 정신의학적 용어로 풀자면 자아의 붕괴를 암시하는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옷을 입지 못하는 병이 바로 그것이다. 그뿐 아니라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내관의 목을 베어버렸다. 꿈이나 무의식 속 환상에서나 벌어질 일이 약해진 자아의 경계를 뚫고 현실로 행동화한 것이다. 당시 왕족이 가졌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고려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무분별한 행위의 연속은 이미 현실 검증력이 떨어진 정신과적 응급으로 사료된다.
“감히 나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는 게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조의 내면에서 라이오스라는 시기심이 더욱 타올랐다. 그는 광폭해진 사도가 두려웠다. 공포나 피해의식은 시기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공포증의 본질은 외부 대상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그러고 보면 영조는 이때부터 본능적으로 뭔가를 준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인 영조와 사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한 실화입니다. 영화 [사도]를 통해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한 가족사에 집중했습니다. 영화 [사도]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소설 [사도]로 인해 다시금 우리 역사가 재조명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준익 (영화 [사도]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