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번성이 극치를 달리던 수세기 동안 중요한 국제 관계는 서구의 주요 강대국 사이에서 전개된 경쟁이며, 18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러시아가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가고 20세기가 되어 일본이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 유럽은 대국간의 분쟁이나 협력의 주무대였으며, 냉전의 한가운데에서도 초강대국의 대결은 주로 유럽의 중심에서 이루어졌다. 냉전 후의 중요한 국제관계의 중심적인 무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이다.
아시아는 문명의 도가니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6대 문명권에 속한 나나들이 있다. 일본 문명, 중화 문명, 동방정교 문명, 이슬람 문명, 서구 문명과 남아시아를 포함하면 힌두 문명까지 추가된다.
4개 문명의 핵심국인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남아시아에는 인도가 있고, 인도네시아에는 부흥하는 이슬람 대국이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에는 몇 개의 중진국들이 힘을 길러 왔고, 경제적인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그리고 강국이 될 가능성을 지닌 베트남 등이 그러한 나라들이다.
그 결과 매우 복잡한 형태의 국제 관계가 출현하고 있고, 그 상황은 18세기 또는 19세기의 유렵 정세와 여러 의미에서 유사하다. 다극화하는 상황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동아시아는 다양한 세력과 다양한 문명이 있다는 점에서 서유럽과는 대조되며, 경제나 정치면에서의 상이점이 이 두 지역의 대조를 한층 더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서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안정된 민주 제도를 누리며, 시장 경제를 실천하고, 고도의 경제 발전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의 동아시아에는 안정된 민주 제도가 펼쳐진 곳은 단 한 나라뿐으로, 몇몇 불안정한 새로운 민주주의 구가, 세계에서 5개밖에 남지 않은 공산주의 독재 정부 중 4개, 그리고 군사 정권, 개인에 의한 독재, 일당 지배에 의한 전제 정치 등이 존재한다.
경제 발전의 정도는 일본이나 싱가포르 수준에서 베트남이나 북한의 수준까지 많은 단계가 있다. 일반적인 경향으로는 시장 경제와 경제 개방이 대세이긴 하지만, 지금도 경제 체제는 북한의 통제 경제에서 정부 규제와 사기업의 다양한 혼합을 거쳐 홍콩의 자유 방임 경제까지 다종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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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구성하는 성원들간의 경쟁이 진정되어 보편적인 국가가 나타나게 되면, 그 문명은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고 도덕·예술·문학·철학·기술·군사·경제·정치적 능력이 꽃피는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하나의 문명이 쇠하기 시작하면 그 문명의 단계도 떨어져,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문명을 가진 새롭게 떠오르는 다른 문명의 공격에 대항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근대화로 세계 문명의 물질적인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하지만 문명의 도덕적·문화적 측면도 함께 높아졌을까? 몇 가지 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예 제도, 고문, 개인에 대한 가혹한 학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묵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서구 문명이 다른 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일까? 그래서 서구의 힘이 쇠퇴하면 도덕의 후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1990년대의 세계 정세는 참으로 '혼돈'의 패러다임 그 자체라고 생각할 만한 증거가 많이 보인다. 세계적으로 법과 질서가 붕괴하고 세계 도처에서 무너져 버린 국가나 무질서 상태가 보이게 된 것 이외에, 세계적으로 범죄가 급증하고 국제 마피아나 마약 카르텔이 출현하고, 많은 사회에서 마약 상습자가 늘어났다. 가족이 와해되고, 많은 국가들이 신뢰나 사회 연대감을 상실하고, 세계 곳곳에서 민족이나 종교나 문명의 차이 때문에 폭력이 만연하여 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리우데자네이루, 방콕, 상하이, 런던, 로마, 바르샤바, 도쿄, 요하네스버그, 델리, 카라치, 카이로, 보고타, 워싱턴 등의 도시에서 범죄가 급증하고, 문명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허물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정치의 세계적인 위기를 입에 올린다. 재화를 끌어모으는 다국적 기업의 급증에 발맞추기라도 하듯이, 국제적인 마피아나 마약 카르텔, 나아가서는 테러 집단이 점점 늘어나 기승을 부리며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법과 질서는 문명의 첫째 가는 필수 조건인데도 세계의 많은 지역 -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옛 소련, 남아시아, 중동 - 에서는 자취도 없이 소실되고 있고, 중국이나 일본, 서구도 역시 심각한 위기에 휩쓸리고 있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보아 문명은 많은 영역에서 야만적인 행위에게 굴복하고 있는 듯한 전례가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가 암흑시대에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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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정치 지도자나 엘리트들은 일극 체제를 완강히 부정하고 참된 다극 체제의 출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1997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회의에서, 중국·러시아·인도·아랍 제국·이슬람 제국·아프리카라고 하는 적어도 세계의 2/3을 점하고 있는 나라들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자국에 대한 최대의 외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미국을 군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자국의 영토 보전·자치·번영·행동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미국은 강력하게 개입하여 착취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수행해 패권을 추구하는 나라, 위선적이며 두 입술을 가진 나라이고, 소위 '금융적 제국주의'나 '지적 식민지주의'의 노선을 취하고 외교 정책이 국내 정치를 크게 좌우하는 나라인 것이다.
인도 학자에 의하면, 인도의 엘리트에게 있어 "미국은 외교 및 정치상의 큰 위협이다. 핵, 테크놀로지, 경제, 환경, 정치 등 인도에 관련된 대부분의 현안에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다른 나라를 동원해서 반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즉, 미국은 인도의 목표를 거부하는 힘을 가지고 타국을 결집해서 인도에 제재를 가하는 나라"이다. 미국의 죄는 "힘과 오만, 강한 욕구"이다. 또 모스크바에서 온 참가자에 의하면, 거리사인이 본 미국은 "협력을 강제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모든 러시아인은 "미국이 패권이나 다름없는 지배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 반대한다.
북경에서 온 참가자도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하고 있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에는 평화와 안정, 그리고 자국에 대한 주된 위협은 '패권주의와 힘의 정치'인데, 이것이 곧 미국의 정책이다. 미국의 정책은 사회주의 국가나 개발도상국을 약화시켜 그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랍의 엘리트들은 미국을 국제 관계에 해가 되는 세력이라고 보고, 일본 국민도 1997년의 여론 조사에서 미국을 북한에 이어서 제2의 위협이라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세계의 문제는 곧 자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다른 나라들은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자국의 문제이지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델라의 말처럼, 남아프리카는 "자신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어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하여 다른 나라가 "아무리 자극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나라가 세계 경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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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새로운 세계 - 다문명에서 현재는 일극-다극 체제이지만, 아마도 다극 체제로 향하고 있는 세계 - 에서 일본은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
첫째로, 문화와 문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은 고립된 나라이다.
다른 모든 주요 문명에는 복수의 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일본 문명이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와 일치하고 있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디아스포라(국외 이산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을 떠나 이주했지만, 원래의 공동체 의식을 계속 가지고 조국과 문화적인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많은 일본인이 미국에 이주해서 미국 사회에 동화하고 있는데, 하와이를 제외하면 일본을 떠난 이민은 대체로 일본의 문화적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국가와 문명의 독자성의 결과로서 일본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문명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 또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관계 혹은 유럽연합의 중핵국들간의 관계, 그리고 동방정교회권의 나라들, 라틴아메리카, 아랍 제국에서조차 점점 강하게 나타나는 문화적인 밀접한 관계가 일본에는 없는 것이다.
공통의 문화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두텁게 서로 신뢰하고 깊은 친교를 나누며 한결 쉽게 협력해서, 필요한 경우에는 서로 지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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