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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라면엔 계란을 넣어야지! 라면만 먹으면 죽어! 어머니와 나는 화들짝 놀라 쥐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는데 정말 라면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장하게 여겨지는 고함 탓이었다. ---「라면엔 계란」에서 훗날 왜 이 순간 어머니를 보며 싱긋 웃어주지 않았나를 자책하는 때가 오리라는 걸. 되돌아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매 순간들이 우리의 역사라는 걸. ---「우산」중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촛불만이 가득한 방은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둠은 모든 걸 공평무사하게 취급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적당한 어둠이 가져다준 평화가 고마웠다. 옆 사람의 숨소리와 온기에 좀더 민감해지던 시간들. ---「한여름 밤의 정전」중에서 내가 단골이면 그이에게도 내가 단골이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단골들을 떠나보냈던가. 오늘, 나의 단골들이 그립다. ---「단골을 가졌는가」중에서 우리는 타락하지 않아서 인간다워지는 게 아니라, 타락의 속도를 늦출 용기를 지녀서 인간다워지는 존재니까. ---「타락의 속도」중에서 오늘 하루도 수천 수만의 스산한 방들이 단지 세입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비슷한 삶이 거래되고 교환되며 방들은 젊음을 집어삼킨다. 집 없는 행복을 실감하는 세상이 궁금하다. ---「지상의 방 한 칸」중에서 인간답지 못함에 대한 증오, 인간을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조건들에 대한 증오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준 격렬하고도 원초적인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에게 존엄을 요구하는 건 폭력이다. ---「증오」중에서 비유의 힘은 그것이 현란한 문학적 기교라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좋은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겪었던 것들에 비추어 스스로 상상하게 해준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중에서 도덕적인 문장이란 도덕을 옹호하는 글을 뜻하지 않는다.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적었다고 해서 도덕적인 문장인 건 아니다. 문장의 경우 도덕성이란 우리가 글로 옮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이해를 뜻한다.
---「인간의 윤리」중에서
그의 청춘을 제대로 견주고 싶으니 차라리 별책부록을 쓰게 해달라. 이것이 처음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정적인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에는 도취가 없고 희망에는 미래가 없다. 그때 사랑과 희망은 세속적 인생론이 덧씌워놓은 윤리와 초월의 영토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최대치의 사랑과 희망에 이른다. 고맙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서. 내가 너를 모르게 해줘서. 이렇게 정직한 슬픔이라면, 우리는 끝내 서로를 몰라도 좋겠다. 기어이 우리의 생활도 우리를 모른 채 뚜벅뚜벅 걸어가 인생을 완성할 테니. - 신용목 (시인) 긴 글은 실력으로, 짧은 글은 노력으로 씁니다. 짧은 글에는 실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짧은 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남의 것에서도 대충 쓴 것은 알아보겠어서 감히 하는 말이지만, 이 책에 실린 손홍규 형의 글 중에 한두 시간 만에 뚝딱 쓰인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순수한 그가 미련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 자취들 앞에서 저는 몇 번은 눈물겨웠습니다. 책의 절반은 ‘체험’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장’인데, 저는 전자가 조금 더 좋았습니다. 저의 베스트 5는 「라면엔 계란」 「우산」 「환대」 「선량한 물음」 「팔을 번쩍 드시오」입니다. 이 삽화들에는, 이문구 소설의 한 대목처럼, 잘 감추어 더 환해진 불빛이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신형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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