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1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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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1쪽 | 635g | 148*210*30mm |
ISBN13 | 9788934908111 |
ISBN10 | 8934908114 |
발행일 | 2001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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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1쪽 | 635g | 148*210*30mm |
ISBN13 | 9788934908111 |
ISBN10 | 8934908114 |
1. 행복에 대한 토론 2. 단순한 지혜 3. 행복에 이르는 길 4. 인간이란 무엇인가 5. 서로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6. 사랑한다는 것 7. 왜 자비심이어야 하는가 8.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가 9. 덧없음에 대한 명상 10. 마음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11. 자기 스스로 만든 고통 12. 마음의 길 13. 생각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 14.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15. 행복의 기술 |
행복은 인간의 목적이다. 2천 여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윤리학 연구에서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단언하였다. 물론 그가 말했던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행복과는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경치를 보고, 쾌적한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일과 행복을 결부시킨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적, 품성적 탁월성을 성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품성적으로는 중용의 덕을 습관으로 형성한 인간이 행복하다. 그러한 품성은 지적 탁월성의 지휘로 성취된다. 결국, 지적 탁월성에 이른 자가 행복하다. 지적 탁월성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으며, 철학적 사고는 그 이성의 핵자에 해당하므로, 가장 행복한 인간은 철학자이고, 행복한 삶이란 이성으로 '관조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오늘날의 즐거움, 쾌락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만을 가져왔지만 '행복이란 무엇인가'하는 논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만큼이나 아포리아를 품고 있다.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행복의 정의는 완벽할 수 없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하워드 커틀러가 티벳의 정신적 지주인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초를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기록을 책으로 펴냈고, 우리나라에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달라이 라마가 쓴 책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본 달라이 라마의 담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책에서 인용된 달라이 라마의 말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의 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다만, 인터뷰의 주제가 하워드 커틀러의 관심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답게 불행하게 사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달라이 라마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으며, 불행에서 행복으로 삶을 전환하기 위한 해답을 달라이 라마에게 구하고 있다. 고독, 고통, 자기혐오, 증오, 이기심 등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감정들이 논의 대상이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무지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이고 불성을 타고났으나 여러가지 영향으로 인해 불성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전제하는 인간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무명에 빠져 있는 인간을 '중생'이라고 한다.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맹목적으로 산다. 무지의 궁극적 원인은 '나'라는 실체 없는 실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고통이며, 그 고통은 집착 때문에 생기므로 집착을 멸하고 보살의 길에 들어서야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서양의 말로는 '에고'라고 번역되는 자아는 불교에서는 허상이며, 실체 없는 거짓이므로 벗어나야 할 대상이 된다. 에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앞서 언급한 부정적 감정과 번뇌들이 싹트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지속적으로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무지하다는 전제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건강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수련을 해야만 합니다. (중략) 난 개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평화롭고 자비롭다고 믿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인간의 그러한 면이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배움과 이해를 통해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고 일상 생활을 해나가는 데 실제로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55~56쪽)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과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해탈을 위해서 먼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연기의 법칙을 깨달아야, 경계 짓고 구획하는 배제의 논리를 벗어나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대승불교의 팔정도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에 이르는 수행의 방법을 규정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나이브하고 이해하기 쉽게 처방을 내리고 있다. 그의 말을 압축하자면, 자비심을 가지라고 한다.
자비심은 다른 생명체에게 폭력을 쓰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공격적이지 않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또한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책임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티벳어로 '체와' 라고 부르는 자비심의 의미 속에는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자비심을 키우면서 사람은 먼저 자신이 고통에서 해방되길 바라고, 그런 마음을 가진 뒤엔 그 마음을 더 키워 다른 사람도 감싸안는 것입니다.(128쪽)
자비심은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내가 무언가를 소망할 권리가 있듯, 타인도 그러한 소망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마음이다. 더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사랑'이 될 것이다. 자비심은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낄 줄 아는 사랑이다. 자비심은 오늘날 낭만화된 개인주의적 사랑보다는 더 보편적인 범주에 놓인다.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독이나 이기심, 바보같아 보일까봐 걱정하는 불안 등은 자비심을 가졌을 때 해결된다. 자비심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상대에게 개방적인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자비심을 기반으로 한 관용과 인내, 감정 이입과 타자의 처지를 상상하는 수행 등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현대 사회는 자비심을 갖기가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파편화된 생활 공간과 개인주의가 심화된 생활 양식은 점점 인간을 고립시키고 있다. 그나마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단위가 가정인데, 이 역시 자본주의의 스펙터클(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유출되는 영상 매체가 대표적이다)과 생활세계의 식민화(인간적 가치들이 점차 돈으로 환산되고 서비스로 전환되고 있다)로 점차 균열되는 형국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이고, 이혼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는 마지막 심리적 도피처인 가정의 기능이 점차적으로 마비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개인이 부담해야 할 고통의 무게는 증가한다. 인간이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없는데, 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은 고통을 회피하거나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기관을 마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은 필연인 바, 고통을 견디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인간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침입해 들어온 고통을 더 강렬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정신과 의사가 많아지고 정신과 약을 처방 받는 일이 흔해진 것은 의학 기술이 발달한 덕분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에 정서적인 지원을 담당했던 공동체가 무력해졌음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워드 커틀러의 문제의식에 우리가 공감을 느낀다면, 서양의 생활양식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일상과 비슷하다는 방증이다. 책이 현지에서 출간된 시기가 1998년이고, 우리나라 초판 출간연도가 2001년이니 20년 가까이 지난 책인데도, 독자의 입장에서 하워드 커틀러보다 달라이 라마가 더 낯설게 느껴진다. 그만큼 우리는 불교적 사유나 생활양식에서 멀어져 있으며,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다. 달라이 라마가 설파하는 '적에게 자비심을 가지라. 그는 나의 인내를 길러줄 스승이다.', '종교와 신앙에 의탁하여 고통을 인내하는 것도 좋은 방식이다.', '자신을 고문하는 중국인에게 자비심을 가지지 못할까봐 걱정한 승려가 있었다.' 등등의 담론은 반감을 일으킨다. 실제로 하워드 커틀러는 달라이 라마의 말에 지속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그의 말이 비현실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의 입장은 다소 이중적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달라이 라마의 말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심리적인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한 성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책의 처음과 말미를 장식하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일화는 그에 대하여 저자가 느끼는 경이를 대변하고 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달라이 라마가 호텔에 머무는 동안에 호텔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친화력을 소개한다. 달라이 라마는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여직원에게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그녀의 호감을 샀고, 그를 보기 위해서 점점 많은 호텔 직원이 몰려들었으며, 나중에는 2,30명의 직원이 달라이 라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가 멀찍이 보고 '타디브 디스키네시아'라고 진단한 군중 속 한 남성과 달라이 라마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 독립 후원 행사에 참여해서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를 만났는데, 저자가 관심 가졌던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남자는 놀랐다가 달라이 라마에게 말을 건네고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달라이 라마에게 보통 사람 이상의 성품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에게 어떤 확신을 준다. '그는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달라이 라마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혐의가 추정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는 합리적인 사고 방식(조금만 더 나쁘게 말하자면 인간을 분석하는 버릇)을 견지한다. 달라이 라마의 담론은 서구적 담론과 화해될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굳이 달라이 라마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과 지지는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정당화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달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임상적 사례, 서양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정신과 연구 결과를 덧붙인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는 달라이 라마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서구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하는 전통을 가졌다고 말했다가, 최근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 서구의 전통을 뒤집고 인간은 본래 위기 속에서 연대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느꼈음을 입증했다고 언급한다. 달라이 라마의 성선설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한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달라이 라마가 강조하는 영성에 대한 이야기도, 달라이 라마의 말 사이에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수술을 한 뒤에도 회복이 빠르며, 수명이 길었다는 통계를 언급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행복한 삶을 위한 마지막 요소를 말했다. 그것은 바로 삶에서 영적인 차원을 갖는 일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나아가 그것들을 초월하는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지적하듯이 세계의 모든 중요한 종교들은 인간에게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똑같이 줄 수 있다. (중략) 사실 사람들의 신앙심이 깊을수록 사망률이 낮아지고 건강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백 건의 과학적 의학적 연구가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깊은 신앙심을 가진 노인이 종교적 확신이 적은 노인보다 골반 수술을 받은 후에 더 멀리 걷고, 또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적었다고 한다. 피츠버그 대학 메디컬 센터의 로나 카사 헤리스와 메리 아만다 듀는 연구를 통해 깊은 신앙심을 가진 환자들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뒤에 식이요법에 더 잘 적응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오래 건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트마우스 의과 대학의 토마스 옥스만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또 다른 연구를 통해 관상 동맥이나 심장 판막에 생긴 병 때문에 심장 절개 수술을 받은 55세 이상의 환자들 중에서 종교적인 신앙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세배나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334~336쪽)
이는 달라이 라마를 신화로 만들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임상, 과학, 통계에 의존하는 사고 방식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신비화하면서 자기 자신을 재확인하는 메커니즘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 책은 달라이 라마의 위대성과 가르침을 설파하면서도 결국 서구적 정체성을 재확인한다. 내용은 동양의 지혜를 말하지만 형식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실현한다. 아니 동양의 지혜를 찬양하는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형식이 한국에서 214쇄로 팔렸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동양이지만 세계 체제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서구에 매우 근접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그들을 초월한다. 한국의 넷플릭스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때 세계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미국,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양이다. 한류는 세계 체제에 빠르게 편입 중이고, 문화 산업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로소 한국은 세계(서양)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것은 한국 문화를 서양의 구미에 맞게 재편해서 얻은 대가이다. K-드라마라는 명칭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국 정신과 의사가 전달하는 담론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우리 문화와 전통이었으나, 오늘날 다시 낯설게 바라봐야 하는 가치들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보다 커틀러가 전하는 연구 결과가 더 믿음이 가고, 자연스럽고, 객관적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이미 서양의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이제 행복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사족처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달라이 라마에 의하면 행복은 마음에 달려 있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타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줄 아는 자비심이 있다면,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덧없는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무명으로 가려진 본성을 되찾고 우리 모두가 깨달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결심, 본성을 되찾으려는 노력 속에 해법이 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처방은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 상황 중 일부를 경시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과업이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이 불성을 되찾는 도정에서 명상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하워드 커틀러가 전하는 명상은 웰빙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을 지우고 내면으로 도피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달라이 라마가 강조하는 균형 감각이 이 지점에서 다시 요구된다. 내면성만으로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달라이 라마는 내면성만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나이브한 말들은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하려는 배려였을 확률이 높다. 저자의 세계관을 고려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최선을 다해 말했을 것이다. 책 속에서 그려지는 명상 역시 저자에 의해서 필터링된 명상일 것이다.
과업을 성취하려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설정한 이상이 있고,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도정이 있다. 분명, 달라이 라마도 그 도정에서 노력이 필요하고 고통이 수반됨을 언급하고 있다. 성급하게 이상에 도달하려고 하는 태도도, 이상은 이상일 뿐이므로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태도도 똑같이 잘못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사소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를 주문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변화한 사람을 믿는다는 그의 말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책에서 소개된 달라이 라마의 말을 종합해보면 최종 심급은 마인드 컨트롤이다.
나는 마음을 조정하여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다른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보다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태도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더 큰 나'가 되려는 노력이 타자를 구원하는 실존에 이를 수 있다. 행복은 자기-변화에 있는 것이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자칫 현상황을 정당화하는 기제에 빠질 수 있다.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삶. 그것은 타자의 삶까지 배우려는 자세, 타자를 선한 삶으로 이끌려는 자세를 포함한다. 달리 말해, 진정한 행복은 공부를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행복한가를 자문했을 때, 의외로 판단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는 공부하는 인간인가?'를 물으면 되는 것이다. 핑계와 변명 너머로, 더 성장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은 행복하다. 이것이 나의 잠정적 결론이다. 더 인생을 살고, 공부를 하면 행복의 정의는 또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행복은 공부하는 삶 속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