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익 포스트모더니즘의 바탕에는 괴상한 모순이 깔려있다. 가령 그(함재봉)는 '동서양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 올려놓고 비교검토할 수 있는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양자를 비교검토하기 위해 동서양의 사상을 과감하게 통약한다. 물론 유교가 더 낫다는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유교가 매사 서구의 사상보다 낫겠는가? 그래서 자기에게 불리한 맥락에서는 다시 문화 간 통약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근대 서구사상과 유교... 중 어느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거나 과학적이라는 거을 판단해 줄 제3의 담론이나 기준은 없다.' 말하자면 양자를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분모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교가 서양의 근대사상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제 3의 주장은 있는데 '못하다'고 판단할 '제3의 담론'은 없다.?
--- p.102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박종홍<국민교육헌장>
거짓말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는 그저 아무생각없이 이땅에 태어났을 뿐이다.그런데 오늘 <디지털 조선일보>게시판에 들어갔더니 누군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끔찍한 농담을 전문 인용해 놓고 그밑에 이렇게 써놓았다. ' 참 다른 모든 모든 것을 떠나서 명문이다. 이 정신을 되살려 민족 중흥을 이룩하자. 그 밑에 추신까지 붙여놓았다. '추신 : 이거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다시 외우게 하자.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쓸데없는 책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으며, 쓸데 있는책 여러개를 잘 모아 정리해놓은 것 같다.'
미있게도 그는 '명문'(?)이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글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 명문은 원래 박정희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 박종홍씨의 것이며 , 나아가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를 베낀것이라고 해두었다. 그랬더니 대뜸 이런 대답이 올라온다. '박종홍이 쓴 것, 일본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는것몰랐습니다. 일본 애들도 하든 안하든 우리가 우리후세에 대한 교육과 국가를 보는 마음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다시한번 되새겨야할 글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는 이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사회 일각에 아직 견고하게 남아있는 어떤 세력의 생각이기도 할게다.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먼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즉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지적 눙력을 재생산 하는것. 둘째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특정 생산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2세들의 머리속에 주입하여그 관계를 재생산 하는것. <국민교육헌장>은 정확하게 이 두 요소만 담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는 기술적 담론의 대상, 두 번째는 종종 정치적 담론의 대상이 된다. 가령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 한국의 전교조나 일본의 일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을 생각해보라. 지배세력에게 '참교육'은 권력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는 골치 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선지<월간조선>에서는 '열린교육은 국가를 깡통으로 만들 것' 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런 사회적 필요보다 학생들 개개인의 교양, 인격적 발달을 더 강조하는 교육철학도 있다고 들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학생 개인의 교양을 앞세운다'는 이 가상한 생각이 천박한 사회에서는 국가와 가정 양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지배를 하는 국가권력은 자기 재생산에만 관심이 있을뿐 학생 개개인의 교양수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반면, 지배를 받는 개개의 가정들은 권력의 위계질서 속에서 자기자녀가 교양있는 인격자가 되어 낙오자가 되기 보다는 교양이 없어도 출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와 가정의 묘한 공모가 이루어진다.
누가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대올로기'(마르크스)가 아니랄까봐 일제와 미국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두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친일을 하다가 반공주의자로 돌변한 군사독재자들의 일본제'국가주의'와, 이들 밑에서 아무생각없이 테크노크라트로 복무하며 개인적으로 출세했던 미국 유학파들의 천박한 미국제'자유주의'. 일본식 국가주의와 미국식 자유주의의 결합. 이것이 우리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우리교육의 문제도 바로 이 권력구성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에게 오직 출세하는데 필요한 영어, 수학, 컴퓨터만 가르치려 드는 가정.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세계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국가가 제공해주는 애국이라는 허위의식. 참교육은 이 두가지 전선에서의 싸움이다.
--- 본문 중에서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그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해괴하고 괴상한 일이다. 나아가 타인의 법적 권리 행사, 존재의 자연적 사실에 대해 제3자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어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통용되고,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다. 사회 자체가 보수 이데올로기의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된 미신이다. 그리고 철학은 오성에 걸린 이 마법과의 투쟁이다.
--- p.160
나치즘은 그동안 문명이 쌓아온 성과를 일거에 무화하고 근대 사회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최초의 근원적 폭력이 행사되던 신화의 시대로 되돌아간 역사의 반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지메를 한다고 아이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이지메는 우리 사회에 잠재된 파시즘의 징후다.
--- p.42
'길들이기'에 대항하는 싸움은 정체성(=동일성) 자체를 거부하고 주체성 자체를 거부하는 소극적인 방향이 아니라, 후기 푸코가 지적한 대로 주체의 윤리적인 자기 구성이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계보학적 폭로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권력 의지를 활용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체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미학의 실천으로 문제의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 p.239
그렇잖아도 우리 사회는 강제성을 띤 정체성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원치 않는데도 생존을 위해 이러저러한 인간관계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뒤집어써야 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심오한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좀 엉뚱한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의 형성이 주체성의 형성과는 별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 주체성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를 끈적끈적한 인간관계의 망 속에 내던져 그 그물에 친친 얽매이는 것, 그것으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잘할 때, 즉 '마당발'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 p.246
공격을 피하려면 공격자, 즉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희생양을 공격할 때 불안한 개체들은 무한한 잔인성으로 집단을 향한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입증한다.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