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너도 조선 사람이다!”
“알아요. 반쪽은 조선 사람이라는 거! 그렇지만……”
“반쪽이라니?”?“아이들이 다 그렇게 놀려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세후는 얼결에 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방금 전처럼 또 가슴속에 담아 둔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였다.
‘제가 왜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바로 그 아이들 때문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이번에도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어 그리 말이 많은 것이냐? 아비가 조선 사람이면, 너도 조선 사람인 것이다! 알겠느냐?”
--- p.14
세후는 여자아이의 창백해진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뛰었다.
개울 건너편에 이르러 다시 돌아보았을 때, 또다시 어디선가 새가 날았고, 여자아이 쪽으로 사쿠라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깊이 담아 놓고, 세후는 얼른 지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올랐다.
씩씩대면서 아버지와 헤어졌던 산기슭까지 올랐다. 옷이 물에 젖어 무거웠다. 산속의 찬 공기가 스며들어 온몸이 심하게 떨렸다.
‘어쩌지?’
공연한 짓을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절대로 왜인과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세후는 빈 지게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왔다. 자꾸만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 p.24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세후의 입에서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카즈키가 고개를 돌려 잠시 세후를 쳐다보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서너 걸음 다가왔다.
(……)
“어서 돌아가거라. 사무라이는 네가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카즈키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세후는 그보다 뒷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왜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먹을 쥔 채 아카즈키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카즈키는 그런 세후를 한동안 마주 보다가, 방금 전보다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공이 되어라! 그게 너희 조선인이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pp.52~53
세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낯선 장면이 상상이 되어 등골이 오싹했다.
아버지는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손에 쥔 감자가 으깨져서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게 보였다. 이어 아버지는 저편에서 감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료헤이에게 눈을 돌리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려보았다. 세후는 그때까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
가슴이 많이 두근거렸고,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누군가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 배위에 탄 사람들이 보이는 듯했고, 그들의 비명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어조로 말했다.
“네 엄마는 그림을 잘 그렸단다. 아비보다 나으면 나았지 덜하지는 않았을 게야. 네 누나가 꼭 네 엄마를 닮았지.”
“네?”
“네 누나가 왜 복사꽃을 자꾸만 그리는지 아느냐?”
세후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는 쓸쓸한 미소로 세후를 마주 보았다.
--- pp.110~111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한 손을 흔들었다. 다른 한 손은 허리춤을 더듬어, 오래전 아버지가 쥐여 주었던 사금파리 조각을 꽉 잡았다. 너무 힘을 주었던지 손바닥이 아팠다. 그 통증이 가슴까지 전해졌다.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사기장은 그저 그릇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물과 흙과 나무와 불로 조선을 빚는 것이니라!’
--- p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