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라는 부사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은 조금 더 힘을 내면 괜찮아진다는 뜻 아닐까. 조금 더 힘을 내면 턱을 움직여 말할 수 있고, 제 발로 걸어서 검사실에 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말할 것도 없이 오기는 ‘조금 더’의 세계에 의지했다. 오기는 무척이나 살고 싶었다.--- p.14
기억이 선명해지고 정황이 분명해질수록 오기는 슬퍼지고 서글퍼져서 비통할 것이다. 차라리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기억이 떠오를수록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다시는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p.34
묵묵히 슬픔을 끌어 올리는 장모를 보면 오기는 함께 울고 싶어졌다. 턱을 움직여 소리 낼 수 있다면 같이 울었을 것이다. 제 슬픔을 장모에게 전달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내는 죽고 자신이 살아남은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함께 아내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미안했다. 가슴속에서 통증이 일었다. 뜨겁게 끓었고 토할 것처럼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그 때문에 오기는 제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침이었다. 오기의 턱이 조금 움직였고 마른 입이 벌어졌고 그리로 슬픔 대신 침이 흘러내렸다. 오기는 계속 침을 흘렸다. 벌어진 턱을 제 힘으로 아물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 p.35
오기는 종종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 동안 힘을 주었는데도 미처 의식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힘이 들어간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그렇게 힘을 주면서까지 움켜쥐고 있던 게 무엇이었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p.79
아내가 돌볼 수 없게 된 후 정원의 나무와 풀과 꽃은 죽어갔지만 집 뒤쪽의 덩굴식물은 더욱 무성해지고 흡착력이 강해져서 정면 쪽 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뻗어오고 있었다. 오기의 방 창문으로도 바람이 불 때면 담쟁이의 커다란 잎이 흔들리는 게 다 보였다. 오기는 그 푸른 잎을 불안하게 올려다봤다. 얼마 후에는 오기의 창을 잠식해 시야를 막아버릴 것만 같았다.--- p.91
“그래야죠. 죽어버렸으니까요. 다 죽었지요, 전부 다…… 다 죽었어요. 기껏 애지중지 키워놨는데, 그만 어이없게 죽어버렸어요.” 잠시 쉬었다가 장모가 말을 이었다. “살려야지요, 내가. 내가 다 살려야죠.”--- p.148~49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