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로 개봉한 <뜨거운 피>의 작가 김언수의 <설계자들>을 읽었습니다. <뜨거운 피>보다 먼저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특히 프랑스 추리문학대상 후보로 오르면서 인정받은 범죄 액션 스릴러입니다.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번에 미국 더블데이 출판사에 1억원의 선인세를 기록하며 출간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이런 류의 범죄 스릴러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장르입니다. 후작 <뜨거운 피>도 비슷한 기조의 작품이지만 좀더 인간 내면의 모습에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초반부는 인물의 묘사가 상당히 심층적이라 지루할 수 있으나 중반부 이후에 뿜어내는 서사적인 사건 전개는 “역시 김언수이다”라는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에 대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고, 마치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긴박감이 느껴져서 여운이 짙었습니다.
주인공 래생(來生)은 누군지 모르는 부모로부터 버려져서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어 고아원에서 성장합니다. 유아기를 넘기고 “개들의 도서관”의 너구리 영감의 보호 아래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성장합니다. 그가 아는 지식이라고는 어께 너머로 배운 글솜씨로 스스로 도서관의 책을 읽은 것이 유일합니다. 그곳에서 자객으로 길러지고, 설계자들에 의해서 설계된 일을 처리하는 암살자가 됩니다. 해방 이후부터 이 계통에서 잔뼈가 굵어진 너구리 영감은 업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으로 통합니다.
이 자객에게 처리된 희생자는 털보네 애완동물 화장장에서 밤에 몰래 화장되어 유골함이 설계자에게 전달되거나 혹은 지시받은 장소에서 흩날리게 됩니다. 점차 독재, 군부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나라의 권력이 넘어가면서 암살업계도 그에 맞추어 기업형으로 변모합니다. 역시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변신을 거듭해야 살아남아 성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어느 분야간 동일한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변화에 늦은 도서관은 뒤쳐지고 도서관 출신의 ‘한자’가 이끄는 패거리는 대통령 선거라는 최대 기회의 파도를 타면서 급성장하게 됩니다.
도서관의 최고 자객 ‘추’가 설계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자 그는 도리려 위험에 처하고 ‘개들의 도서관’도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결국 도망자 ‘추’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래생을 마지막으로 만난후 이발사라는 자객과 최후의 일전을 치루고 살해됩니다. 평소 설계자들의 설거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래생은 새로운 눈을 뜹니다.
한때 래생은 스승 교도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도망치듯이 도서관을 떠나 공장에서 선반 기능을 하며 살던 시절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21살의 귀여운 여성을 만나 동거를 하며 처음으로 사람 다운 평범한 일상을 살아봅니다. 하지만 이 행복한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래생은 그 끝이 6개월 만에 다가오자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떠나게 됩니다. 편지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끄윽 삼키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한참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래생은 ‘추’의 복수와 냉소적인 너구리 영감에게 반기를 보이기 위해 ‘한자’와 대결이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한자는 이미 정치, 기업들의 권력자의 비호 아래 급성장하고 보안기업의 대표가 되어 일개 자객인 래생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목적으로 ‘한자’를 노리는 의사 출신 여성 설계자 ‘미토’를 만나면서 일이 복잡해지게 됩니다.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접해본 암살자라는 소재이지만 이토록 신선하면서 한국적이고 서스펜스 넘치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은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도 영화화 예정입니다. 한편으로는 김언수의 작가의 작품 수가 적어서 안타깝습니다. 반갑게도 올해 “빅 아이”라는 작품이 10년만에 나올 예정이라는 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서 신간이 나와서 독서의 짜릿함을 느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