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8년 10월 24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398g | 148*210*30mm |
ISBN13 | 9788936433673 |
ISBN10 | 8936433679 |
발행일 | 2008년 10월 24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398g | 148*210*30mm |
ISBN13 | 9788936433673 |
ISBN10 | 8936433679 |
1장 아무도 모른다 2장 미안하다, 형철아 3장 나, 왔네 4장 또다른 여인 에필로그_장미 묵주 해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첫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이라는 기구한 행로를 걸어가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슬픔을 애써 외면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연적으로 슬픔을 함의한다. 신경숙은 언제나 그 본연의 슬픔이라는 것에 정면으로 마주한다. 독자에게 매번 큰 생채기를 남기면서도 그 슬픔의 내면을 깊게 후비 파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혹은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마주하면서 파토스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신경숙 소설의 일관된 특징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마에 대해서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뼈 저리는 슬픔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신경숙의 신작 <엄마를 부탁해>는 제목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가족과 엄마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가족이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어지는 소설들이 다 그러하듯 이 소설 또한 그 집필 의도가 분명하다. 소설은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라든가 가족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염원,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는 이러한 상투적인 주제를 엄마의 실종이라는 꽤 참신한 발상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여준다.
소설의 첫 문장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된다. 가족의 실종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내던지며 읽는 이를 쉽게 도발하는 이 첫 문장은 앞으로 밝혀지게 될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면 더 큰 쓰라림으로 다가온다. 보통 잃어버렸다는 말은 자신의 소유이던 것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지갑을 잃어버렸다'거나 ‘차표를 잃어버렸다’와 같이. 그런데 엄마를 잃어버렸다니. 아니 그 전에 엄마는 과연 소유할 수 있는 존재인가.
어느 날 서울역에서 어이없이 실종된 엄마를 찾기 위해 가족 모두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이다. 가족들은 엄마가 실종된 뒤에 긴급 대책 회의를 갖고 전단지, 신문 광고 등을 동원해 엄마 찾기에 나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엄마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될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싸한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던 엄마와 마찬가지로 가족들 중 누구도 엄마의 존재를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엄마가 실종되리라는 최악의 상황을 예비해 놓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이들 가족의 비철저성은 엄마의 미약한 존재감과 맞물려 울화통이 터질 만큼 잔인하게 느껴진다.
가족들의 보잘 것 없는 기억에 의존한 엄마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단지를 통해 연락해 온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엄마는 소를 닮은 눈을 가졌고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며 슬리퍼로 인해 발가락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팬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도심을 홀로 헤매고 있을 초라하고 가엾은 노파의 모습을 이토록이나 핍진하게 묘사하며 외면할 수 없는 진실에 마주하도록 만든다. 물론 목격자들의 말은 사실이라기보다 가족들의 간절함이 빚어낸 환상에 가깝다. 전단지 속의 엄마 사진은 소의 눈빛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최근의 얼굴이 아니었으며 실종 당시 엄마는 파란 슬리퍼가 아닌 베이지색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망정 뼈아픈 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처럼 우직하게 일만 하고,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는 존재. 그것이 엄마라 불리는 이의 모습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후회라는 감정을 통해 보여준다. 엄마가 실종되는 날에도 북경을 여행하고 있었던 첫째 딸은 결혼을 하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며 엄마 속을 썩이던 과거를 후회한다. 촉망받던 어린시절부터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살아왔던 장남은 생활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던 검사의 꿈을 버린 것을 후회한다. 아내의 손길이 없이는 아무 것도 혼자 하지 못하는 남편은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며 습관처럼 성큼 앞서 걷느라 아내를 인파 속에서 놓쳐버린 그 날을 후회한다. 이들의 뒤늦은 고해성사는 각 장으로 병치되어 드러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들이 후회하는 것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까지는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무신경함과 자그마한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들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짐을 깨닫게 된다.
가족들이 털어 놓는 후회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들이 과연 엄마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엄마가 사라진 뒤 각자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은 한결같이 가족의 굴레 안에서만 규정되어 있다. 그들은 엄마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엄마에게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놓여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결국 엄마가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왔다는 것만 기억할 뿐,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결국 앞서 말했던 엄마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엄마의 존재를 가족의 굴레 속에 한정시키는 것은 엄마의 일생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소설에는 장남이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또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엄마에 대한 참된 이해의 시작이다. 엄마의 삶의 모습들을 '희생'이라고 규정짓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임을, 엄마는 우리가 소유했다가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후회라는 감정보다 참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설은 모두 4개의 장과 한 개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1~3장에는 엄마의 실종에 따른 남겨진 가족 구성원들의 후회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나타난다. 큰딸, 장남, 남편이 각 장의 주인공이 되어 기억 속의 엄마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1장과 3장에서 서술자는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그'를 대신해 '너'와 '당신'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소설 속 인물만을 지칭하지만, '너'나 '당신' 같은 2인칭 대명사는 소설 속 인물과 더불어 독자까지 겨냥하는 효과를 가진다. 2인칭의 사용은 냉엄한 질책과도 같은 효과를 내면서 인물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참회의 장으로 끌어내린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일인칭 시점을 통해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는 것보다 더 강한 울림을 준다.
마지막 4장에서는 그동안 소재를 알 수 없었던 ‘엄마’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의 목소리로 엄마의 삶에 대해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엄마의 삶은 가족들이 기억하는 것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딸로서, 여자로서 자신만의 삶을 오롯이 살아 냈던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그 누가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었을까. 가족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엄마의 모습은 엄마의 삶 전체에 있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욱신거리고 고단한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새 안에 깃든 가볍고 투명한 존재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유롭게 비상하는 엄마의 모습은 자식들에게 짐 지워진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낸다. 비록 비극으로 종결된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 자그마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평범한 단어 하나가 화려한 수식에 기댄 유창한 문장보다 더 가슴을 울린다. <엄마를 부탁해>는 장편소설답지 않게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며 명쾌하고 화려한 수사도 없지만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이 소설은 정서의 과잉 분출을 애써 억제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작품 전체에 절절한 그리움과 애달픔의 정서가 묻어나온다. 이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정서적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느 정도는 소설 속 '엄마'와 닮아 있다. 엄마를 회상하며 지난날을 후회하는 자식들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보통의 삶 속에서 하나의 파문을 일으키며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며 충분히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진실 속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짙게 배어나온다.
신경숙만의 문체가 있다. 신경숙만의 향기가 있다. 신경숙만의 우위優位가 있다. 이러한 그녀만의 '문체'와 '향기'와 '우위'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역시 신경숙이다, 라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말이다. 1985년 등단한 이후 그녀가 쏟아낸 수많은 텍스트들은 앞서 언급한 공식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만의 선연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안정적 창조가다.
궁중 무희의 신분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사랑한 실존 여인 '리진'의 삶을 그린 소설 『리진』으로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포효했던 신경숙은 불과 1년여만에 전혀 새로운 소재를 담은 장편 한 권을 선보였다. 그녀는 신작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로 인간에게 각인되어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텍스트 위에 감동적으로 녹여냈다.
소설은 총 네 개의 장과 하나의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각 장마다 시선의 흐름을 주도하는 화자가 교체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장의 화자는 '너', '그', '당신'으로 바귀면서 '엄마'의 존재성을 입체화한다. 작가는 딸을 '너'로, 아들을 '그'로, 남편을 '당신'으로 설정했다. '나'라는 친숙한 일인칭 주어를 거부한 채 내가 아닌 타인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차용한 작가의 고집은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 좁힘은 종내 소설 속 엄마를 독자 '나'의 엄마로 치환시킨다. 곧 소설 속 '너', '그', 당신'은 곧 현실의 '나'가 된다. '네' 회상이 나의 회상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며, '당신'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작중인물의 호칭을 가공 실명이 아닌 일반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 일갈을 향한 문장의 절제미와 합리성을 의도화했는지도 모른다.
네번째 장 엄마의 회상씬이 인상깊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시선을 주도하는 넷째 장은 엄마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전지적 시각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엄마는 시선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자신의 독백을 주도한다. 그 독백에는 엄마로서 살아야만 하는 십자가를 내포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함몰되진 않는다. 여자로서의 비밀과 방황도 함께 있다. 즉 세상 모든 '엄마'가 발현해내는 '신성神聖'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人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교차 합일을 통해 '엄마' 속에 내재한 신의 속성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 로 시작하는 에필로그 <장미 묵주>는 소설의 완성도를 오롯하게 만든 텍스트 연금술의 극치다. 소설을 시작한 '너' 큰딸의 시선은 엄마를 잃어버린 먼 훗날의 시점으로 회귀하여 소설을 끝맺음한다. 미켈란젤로의 명조각상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며 애원하는 큰딸 '너'의 마지막 명장면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 손으로 보듬는 모성에 대한 고개숙임이자 찬탄이리라.
대중음악가 이적은 이 소설을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프리뷰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평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모성을 빚진 자식들의 원론적 죄값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단선적 조망은 신경숙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창조한 경외스런 텍스트에 대한 지엽적 감상의 오류이자 모독이다. 감히 평하건대,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인류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오마주이자, 온전하면서도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단층 해부한 'CT촬영'이다.
매우 깊은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장 곳곳에 작정하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고결한 주제를 뛰어난 연금술로 완벽하게 창조해낸 텍스트에 별 다섯개는 한없이 적게만 느껴진다. 한국 문단에 신경숙이 있어 행복하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참, 희한한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엄마가 아닌 시어머니의 삶이 길다란 끈처럼 느릿느릿 지나가다니. 고향이 그쪽이어서, 중요한 날 홍어를 내놓지 않으면 찾아온 손들에게 민망한 그 고장이어서 일까? 아니면 말투가 닮아서일까? 아니면 다 큰 자식(심지어 머리 희끗해진 나이의 아들) 등을 쓸어주는 행동이거나 늘 전쟁을 머리꼭지에 달고 살면서 쌀 떨어져 새끼들 입에 밥 못 들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태도이거나, 그도 아니면 온다 해놓고 늦어지는 자식들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니면 내 배로 낳은 내 딸을 나보다 더 바싹 붙어 길러낸 그 악착스러운 정성 때문에?
나는 시댁 식구들의 그 끈끈하고, 다정스러운 친밀함 때문에, 어머니의 그 온갖 토속신앙, 온전히 자식들 앞에 바쳐지는 기도 때문에 살며 좀 진저리를 낸 편이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시집온 지 17년 만에 어머니와 조금 격조해진 요즘이라 더 그랬다. 편치 않았다. 어머니의 삶을, 마흔 몇 해 여자로 살아온 내가 누구보다 잘 헤아리면서 외면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찔러댔다. 아, 죽겠다. 이 책.
신경숙 소설에다 ‘엄마’ 운운할 때부터 이 소설이 얼마나 나를 괴롭힐지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서 ‘서평도서 신청하세요.’라는 어느 사이트의 글도 외면했는데, 결국 내 손에 들어왔다. 스탠드 불빛이 유난히 따갑다 느끼면서 읽어댔다. 눈물이 비질비질 흘러내리고, 불편해 죽겠는 심정으로.
나는 두 딸의 어미다. 그리고 한 여자의 딸, 한 여자의 며느리, 한 남자의 아내다. 그리고 그들에 붙은 온갖 군상의 무엇이다. 버겁기 그지없다 느낄 때가 많다. 그게 힘이고 행복이라지만 다 떼어 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럴 때 인정하기 싫지만 시어머니의 삶을 떠올린다. 소설 속 ‘너’의 어머니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시어머니의 삶. 그녀와 17년을 살며,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 내가 시집 온 이후의 시절을 그림 그리듯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럴 정도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보고, 느꼈다.
언젠가 내가 시어머니거나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쓴다면, 딱 이랬으리라 싶은. 그러나 작가 아닌 나는 절대로 쓰지 못했을, 그래도 한 번쯤은 내놓고 싶었을 이야기. 아직 엄마와 시어머니가 살아 계신 이들 모두가 하나씩의 결심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엄마가 여자이고, 엄마도 엄마가 그립다는 걸, 제발 좀 알아주자.” “엄마의 부재를 한 번이라도 뼛속 깊이 새겨 보자.”
아무튼 이래서 신경숙 소설이 읽기 싫다. 심장 속까지 후벼 파 대는 그녀. 그래서 신경숙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