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달리, 가우디와 같은 역사적인 천재를 배출한 나라, 검은 황소처럼 힘이 넘치는 열정의 나라, 신비롭고 관능적인 힘이 용광로처럼 뿜어져 나오는 나라. 다시 잠을 이루려고 해도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콩나물처럼 마른 서울의 사람이니까. 스페인이 그렇게 열기에 넘쳐 나를 휘두르면 며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하면 앞으로의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잠든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쩌면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비록 지금은 이렇게 겁이 나서 무서워하고 있지만 뭔가 내게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된 걸 거야. 그래도, 가는 거다. 얼떨결에 따라온 지옥 훈련이라고 해도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는 아랑곳없이, 창밖으로는 수많은 별들이 아름다운 모험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 p.41 「아름다운 모험의 길, 스페인으로」 중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잠이 들어 버린다. 마치 태고의 공기 속 이끼 내음과 수백 만 그루의 나무 향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스페인은 정말 강렬한 곳이다. 자다가 방안이 너무나 추워 양말을 신고 옷을 다 꺼내어 입고 다시 잠이 든다.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면 내 몸과 마음은 더 강해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지금은 콧물이 흐르고 있지만. 새벽이다. 좀 더 눈을 붙이자. 안 그러면 이 강렬함에 눌려 나 같은 약골은 바로 쓰러진다구!
--- p.99 「태양, 태양, 태양.」 중에서
바닷속 한가운데처럼 고요하고 신비롭다. 우주선에서 바깥으로 나가보는 심정과 흡사한 기분으로 차문을 열어본다. 괜찮은 것 같다. 찐빵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초록빛 화성의 한가운데에 서본다. 갑자기 뜨거운 햇빛과 거대한 구름과 평원이 소음을 일으키며 내 주위로 뻗어나간다. 잠시 동안 나를 흔들고 가는 빈혈. 그리고 적막. 마치 윈도우의 시작 화면 속에 들어온 듯 거대하고 파란 하늘과 하염없는 초록빛의 초원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태양은 바로 머리 위에서 이글거린다. 하늘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정말 아름답다! 넋이 나갈 정도로 고혹적인 풍경과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에 경탄이 절로 난다. 오염된 것이라고는 없는 안달루시아의 초원. 순도 100퍼센트의 태양과 공기와 초원이 뿜어내는 에너지 속에서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햇빛이 뇌를 증발시킨다. 왠지 시원하다. 마치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처럼 뜨거우면서도 시원하다. 땀도 흐르지 않는다. 금세 말라버린다. 이건 가장 상쾌하고 아름다운 꿈이다! 악몽과 아름다운 꿈이 교차하는 안달루시아의 대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 p.63 「테스토스테론적인 풍경의 습격」 중에서
황금으로 뒤덮인 드높은 제단, 이보다 더 화려한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는 복잡하고 섬세하고 데코레이티브한 수많은 장식들, 콜럼버스의 집채만한 관, 천장의 끝없는 높이와 아찔한 깊이. 심연. 이것은 성당이 아니라 해일이다! 내가 얼마나 얄팍한 삶을 살았는지 신이 그 거대한 목소리로 꾸짖는 느낌이다. 아, 스페인, 세비아, 안달루시아. 제발 현대병을 앓는 나를 용서하세요. 영혼이 퇴화된 인간을, 개미처럼 작아진 인간을, 납작해진 영혼을. 나의 작은 존재감을 느끼며 성당을 나온다. 그저 그늘에 앉아 좀 쉬고 싶다. 에고 허리야! 아,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다시 여기 와 천천히 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극치의 아름다움 앞에서 다리가 아파 쭈그리고 앉은 내 자신이 너무도 처량하다. 흑흑.
--- p.91 「지친 몸 탓 흠뻑 스미지 못하는, 아름다운 세비아!」 중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자질구레한 기억은 모두 체에 걸러 버리고 의미 있는 덩어리만을 남긴다. 느린 시간 속에 들어오자 무언가 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여러 가지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시간이 지난 뒤에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지 알게 되는 것도 시간의 힘이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하지 못해 고민하지만, 결국은 거리를 두고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인생의 중요한 것을 구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코앞에 두고는 절대 보지 못하던 것들도 적당히 거리를 두면 형태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등바등 답을 찾으려 고민하기보다는 스페인 사람들처럼 문제에서 벗어나 낮잠을 즐기고 나면 문제의 핵심이 한눈에 파악될지도 모를 일이다.
--- p.121 「마음을 비우고 쉬엄쉬엄 삶을 즐기자」 중에서
로마시대의 골목과 중세의 성당들이 이어지는 거리. 그 많은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있는 오래된 돌들, 조각으로 장식된 벽들. 성당이 보일 때마다 들어가 본다. 영혼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 안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오래된 성상들을 보며 마음의 조급함을 또 한번 씻어내리고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작은 골목으로 훌훌 걸어나가본다. 너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폭의 골목, 다닥다닥 붙은 발코니, 손때 묻은 석벽들. 이런 골목들이 바로 바르셀로나의 명물이다. 아득한 시간과 사람 냄새가 어우러진 골목들을 걸으니 순례자가 된 기분.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순례의 골목도 바르셀로나 어딘가에 있다던데. 왠지 그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어가고 싶어진다. 도대체 자유의 끝은 어디인지. 골목을 벗어나 다시 람블라스의 대로로 돌아온다. 시간도 지금 현재로 돌아온다. 잠시 적응이 안 된다. 인파에 밀려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음의 나침반을 따라서.
--- p.140-141 「아련한 옛 꿈속 같은 람블라스」 중에서
이대로는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 가우디의 다른 작품도 봐야지!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우리가 택한 곳은 구엘 공원. 태양이 너무나 뜨거워 비둘기들도 날지 않는 오후. 가우디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본다. 마치 학창시절에 좋아하는 스타의 책받침을 사던 심정으로 가우디의 기념품을 침을 질질 흘리며 구경한다.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다. 아! 세탁기 속의 빨래가 된 듯, 모든 비루한 생각과 치졸해진 존재를 뒤엎어버리는 웅장한 체험을 하게 되다니. 정말이지 생생히 살아 있는 것 같다! 아니 그 동안의 나는 진정으로 살아 있었던 것일까요, 가우디 선생님?
--- p.167-168 「사그리다 파밀리아에서 만난 가우디, 가슴 벅찬 충격!」 중에서
스페인은 그렇게 간단한 나라는 아니다. 온지 열흘이 되어서야 겨우 적응이 될 정도로 이곳은 너무나 깊고 크고 뜨겁고 느리다. 너무나 느려서 좀 고생을 했지만 지금이라도, 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나를 완전히 받아들여줘서 고맙다 스페인!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마치 전생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파티가 끝나간다. 밤바람이 시원해진다. 손님들 속에서 스마일 언니가 미소를 날려 준다. 이번엔 약간 섭섭해 하는 미소다. 아, 미소와 웃음에도 천만 가지의 언어가 있구나. 천 개의 태양을 가진 스페인, 사람들이 모두 작은 태양인 스페인에서는 그렇다. 작은 것 안에 큰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늠이 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또 하나의 여행이 어스름 저문다. 밤 별들이 별사탕처럼 크고 달콤해 보인다. 저걸 따 먹으면 어제보다도 더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 것만 같다. 몇 천 년쯤 되는 시간의 깊이만큼 깊은 잠 속으로 말이다. 이제는 그런 다이빙도, 와일드한 스페인도 다 안을 수 있다. 내 마음 속 좁고 어두운 골방이 스페인을 만나 드넓어졌다. 그 공간 안에서 이제는 무엇이든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고 싶다.
--- p.226-227 「가장 나다운 나 자신이 되는 방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