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녀의 꿈은 한결 같았다. 그러나 3학년 1학기, 아희씨는 차근차근 가꾸어가던 미래를 스스로 부수었다. 뭐라도 될 것 같던, 열정적으로 살던 선배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을 겪고 난 뒤였다. 그녀는 ‘내일 죽어도 여한 없는 삶이 뭘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동경하던 영화배우가 떠올랐다. 재능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그냥 하고 싶어진 거였다.
---「‘내일 죽어도 여한 없는 삶이 뭘까’를 고민했어요 - 연극배우 변아희’」중에서
낮에는 회사일, 밤에는 음악인으로 산 지 10개월. 몸도 축 처지고 목이 아팠던 션만은 병원을 찾아갔다. 군산의료원에서 임파선 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원망보다는 치료비 걱정이 앞섰다. 일해서 번 돈은 악기 사는 데 거의 다 쓰고 없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긴 싫어 고민하던 때, 누나가 선뜻 “건강하기만 해”라며 션만을 도와주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 없이 약물로만 치료가 가능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션만은 항생제를 맞으며 3개월간 거의 누워서 지냈다. 그 시간 동안 여자친구 남민이씨가 간호를 해주었다. 그는 모든 것이 고마웠다. 그러자 막연하게 ‘서른 살에는 어떻게 살까?’ 고민했던 것에도 길이 보였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늘 불안하고 흔들렸거든요. 앨범을 작업하면서도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 컸고요. 항상 정확한 목표만 뒀어요. 그게 안 되면 좌절했고요. 그런데 몸이 아프니까,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다. 얼른 나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한 번 사는 인생, 오늘 하루하루만 생각하니까 음악에 매진할 힘이 생겼어요.”
---「 ‘암 겪으니 음악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뮤지션 신현만(션만)’」중에서
산하씨는 “대학은 꼭 안 가도 돼”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자라왔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옮기며 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이 “대학에 가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할 수 있어”라고 권유할 때는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가치 있고 멋진 삶을, 대학 바깥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모든 것이 흐지부지 끝나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을 흉내 내며 사는 것 같아서 조바심 난 적도 있다. 그렇지만 “할 것도 없는데 수능 봐서 대학이나 가야지”라는 선택지는 영 내키지 않았다.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고 직장에 다니고 아기엄마가 될 동안, 산하씨는 보편적인 삶에서 비껴나 부딪히고 좌절하고 도전했다. 후회는 없다.
“지금은 발효 빵 작업에 만족을 느껴요. 이걸 해서 돈을 얼마 벌고, 몇 년 후에는 카페를 차리고, 이런 생각은 안 해요. 그런 게 있으면 좋겠지만요. 오늘 마음에 드는 빵을 만드는 거 자체가 좋아요. 손님들이 맛있게 드시나 훔쳐보기도 해요. 사실, 발효 빵을 평생 하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나이 들면, 미술치료가 하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당장은, 발효 빵이 잘 만들어지는 거, 그거면 충분해요.”
---「 ‘나중 일은 모르죠, 지금은 발효 빵 만드는 게 참 좋아요 - 파티시에 이산하’ 」중에서
상우씨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더디게 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만든 약초 제품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 평균 50~70만 원씩 주문 전화가 온다. 농사지은 지 7년째, 땅을 임대하고 작물을 사면서 진 2억 원의 빚도 차츰 줄고 있다. 올해는 와송으로 3억 원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게으른 농부 상우씨는 말한다.
“농부는 1년 내내 일하지 않아요. 저 같이 게으른 농부도 콩 농사지어서 논 1,600평을 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평생 소원이 논을 갖는 거였거든요. 농사는 어떤 직업보다도 매력이 있어요. 체계적으로 하면요. 저는 사람들에게 약초나 발효식품을 알리고 싶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들은 산으로 가잖아요. 그분들이 산책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약초를 가공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요. 진정한 의미의 ‘6차 산업’, 그게 제 꿈이에요.”
---「‘약초 팔아서 3억 수익, 저는 게으른 농부예요 - 약초 농부 강상우’」중에서
주방에서 요리할 때 은영씨는 무아지경이다. 잡생각이 없다. 음식을 접시에 담을 때는 행복하다. 대열씨에게 배운 대로 손님들에게 직접 가져다주고 음식을 설명할 때면 가슴이 벅차다. “형, 같이 일하자”고 끊임없이 조르고 흔든 대열씨가 없었다면, 영영 모르고 지냈을 세계. 오후 3시에 첫 끼니를 먹고, 자정이 가까워야 퇴근하는 이 생활이 즐겁다. 이제 은영씨는 서울로 가고 싶지 않다. 물론 가끔은 서울에 가서 새로운 메뉴를 먹어보고 연구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다. 그는 ‘청춘호텔’이 자리를 잡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파는 식당도 꾸려보고 싶다. 군산에 온 지 만 1년, 서울에서만큼 치열하게 산다면 더 큰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곳. 그는 군산이 맘에 든다고 했다.
---「‘월급이 반의 반 토막! 그래도 요리를 택할 거예요 - ‘청춘호텔’ 김은영’」중에서
형석씨의 꿈은 세탁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모여서 세탁 일을 한다면, 주 5일 근무도 가능할 테고, 아플 땐 마음 놓고 병원에 갈 수도 있다. 삶의 질이 보장되는 거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 후배들이 같이하자며 뜻을 모아 준비하고 있다. 세탁협동조합을 만들려면, 기계가 들어갈 수 있는 공장을 마련해야 한다. 공장에서 조합원들은 세탁과 다림질을 하고 옷을 관리한다. 조합원들이 각자 운영하던 가게들은 세탁협동조합 드라이 데이 1호점, 2호점, 3호점으로 바뀌겠지. 평생 동안 주 6일 근무를 해온 조합원들은 평일에 하루 더 휴가를 쓰는 자유까지 누리게 될 테고. 형석씨는 세탁협동조합을 만들고 나서는 경영을 공부하고 싶다. 조합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지만 조합원들에게 힘이 실릴 테니까. 그러나 같이 협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나 삼촌 연배들로, 젊은 나이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경영학은 공부체질이 아닌 그가 해야 한다. 협동조합으로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연애도 하고 싶다.
---「 ‘대형 마트 정규직원 그만두고 세탁 일 배워서 독립했죠 - ‘드라이 데이’ 김형석’---「 ‘대형 마트 정규직원 그만두고 세탁 일 배워서 독립했죠 - ‘드라이 데이’ 김형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