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상우는 암세포를 절제해내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지 알량한 정의감을 가진 변호사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우가 할 일은 높은 수임료를 받아 챙기고, 그 대가로 이 어린 살인자를 법의 사각지대로 안전하게 숨겨주는 것이었다. --- p.12
“이제부터 모두가 자네들을 부러워할 거야. 자부심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라도 좋아. 그렇지만 진짜 변호사 생활은 3층부터 시작하는 거니 유념들 하게. 제군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며 더 높은 층수에 오를수록 직업윤리가 어쩌니 영혼 없는 변호사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듣게 될 테지만, 그런 시기와 질투에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어. 군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만 기억하고 믿으면 되는 거야.” 정훈은 젓가락으로 유리잔을 두드리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더 높은 층수에는 더 달콤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과 성공이 바로 그곳에 있는 거지. 내 말이 거짓인지 의심되면 어디 한번 올라와 보라고. 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7층에서 군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 pp.28~29
자다 일어난 변호사는 난데없이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깔려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자존심은 이미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눈가에서 뜨거운 것이 그렁거렸다. 가슴이 눌려 숨이 막혔고 눈앞이 아득해져갔다. 그때 아등거리는 손에 누가 쥐어주기라도 하듯이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부드럽게 잡혀 들어왔다. ‘안 돼. 이건 너무 위험해.’ 그러나 몸뚱이는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깜짝 놀란 남자는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고 날카롭게 깨진 병은 가까스로 목을 스쳤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의 목에서 분수 같은 피가 터지면서 누워 있던 상우의 얼굴과 셔츠를 흠뻑 적셨다. --- p.48
병호의 지문과 머리카락이 발견된 흉기. 병호는 CCTV의 사각지대 삼백오십 미터를 이동하는 데 이십 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그 옷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다. 게다가 피해자의 모자를 전리품인 양 챙겨갔다. 이 모든 정황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병호가 사람을 죽였다. --- p.60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지나가던 백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런데 지금 그 부모가 찾아와 변호를 부탁한다.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실이 손에 쥐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검은 천막 뒤에 몸을 숨긴 채 원하는 대로 인형을 조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인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웃고, 울게 될 것이다. --- p.107
“……형,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잠시 통화 좀 해요. 부탁할게요.” “그래, 부탁은 그렇게 하는 거야.” “예, 알겠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안 돼, 바빠.”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분명히 방금 전에…….” “내가 언제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어?” 다시 전화를 끊었다. 곧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상우는 쌍욕을 목구멍까지 장전해 놓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영이 빨랐다. 그는 방금 상우가 일러준 대로 용건만 짧게 이야기했다. “형이 사람을 죽인 걸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