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3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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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2쪽 | 417g | 148*210*20mm |
ISBN13 | 9788954610414 |
ISBN10 | 8954610412 |
발행일 | 2010년 03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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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2쪽 | 417g | 148*210*20mm |
ISBN13 | 9788954610414 |
ISBN10 | 8954610412 |
1장 2장 3장 4장 미시마 유키오, 그 인간과 문학(사예키 쇼이치) 『가면의 고백』에 대하여(후쿠다 쓰네아리) 해설 ㅣ 가면을 쓴 작가의 고백(허호) 옮긴이의 말 미시마 유키오 연보 |
모든 사람에겐 한개 이상의 가면이 있기 마련이다. 부끄럽고 약한부분을 가리고 순간순간의 분위기에 맞춰 써야할 가면들이 그것이다. 결국 자신을 가려줄뿐임을 알지만,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것도 인간이다. '가면의 고백'역시 자신을 대리할 가면뒤의 진실을 거울속의 자신에게 털어놓듯이 독자들에게 고백하고 있다.
병적으로 심약했던 어린시절, 강한육체에 대한 탐욕 과 욕망, 남성스러운 땀과 화살박힌 왕자의 육체에 대한 동경들, 그리고 그 잔인함에 대한 탐닉. 또래들과 다른 독특한 정신적인 특징에 대해 고백하는 첫 부분은 태어날때의 그 장면조차 기억한다는 화자의 말에 한순간의 환상 또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특징, 그것은 급우들과 어깨동무할때 생기는 성적인 변화들과 욕구에서 느끼는데, '타고난 결함'이라 표현하며 동성적인 특성을 인정하게 된다. 여자에게 느낄수 없는 자신만의 특징에 대해 그는 '정상인'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다.
동성애를 갈구하는 본능적임 삶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정상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그는 내면적으로 많은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그때, 폭탄에 의해 죽음에 이르고 싶다는 충동을 가지게 되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해 비상발령이 떨어지면 누구보다도 빨리 대피소로 도망가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타고난 결함'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자체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자각으로 죽음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어렵다. 세계문학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대체적인 감상이다. 읽는 사람들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를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말이 정해지는 일반 소설들에 비해 주제없는 그림을 던져주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생각할지 그것은 내 몫인것 처럼.. 전무후무한 작가의 최고소설이라고 극찬하는 해설부분에서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라는 의구심만 들뿐.. 다른 사람의 서평에 동감하지 못하면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은 언제부터 생겼는지 무의미한 시간을 독서에 할애한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동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동경을 ‘나’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심리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을 구사한 회심의 미학적 개가(凱歌)이다.
마치 동성애의 고고학적 고찰인양 자신의 성장과정상 성적 발현의 특징들을 성애와 관련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곁들여 당사자인‘나’의 다수와의 다름에 따른 고통에 무심한 듯 동정과 공감을 요구할 만큼 교활하다. 이렇듯 배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성적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의 심리적 갈등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탐색한다.
그 탐색은 융의 자아와 자기의 분별적 추구와 같은 지극히 분석적인 성찰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남성성의 모순적 발현에 저항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처참한 고통이 있었음을 확신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내면의 반복적인 기만, 그 거짓된 내면이 진실처럼 굳어져야했던 인물을 통해서‘사랑’의 본질을 발견케 하는 작업이 되고, 또한 마음속에 감추어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고백’이라는 드러냄의 형식으로 내밀한 감성의 세계를 통해 증언하고 있는 정신과 육신의 배반적 동거라는 낯선 가능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고교시절의 한 일화인 버스 안내양에 대한 동급생들의 여성에 대한 반응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동성애를 위장하기 위하여 과잉의 성적 언사를 행사하는 기만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어떠한 성적 유발이나 관심도 일으키지 않는 친구의 여동생에 남성으로서의 호감과 친밀감을 가장하여 성 정체성의 정상성을 외부에 확신시키려는 자기 불안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남성에게만 반응하는 소년의, 청년의 육체라는 배반된 자기 인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감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된 외연, 가면을 자기화 시킨다. 그럴수록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혐오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이 가면이 진실과 혼동을 일으키고 일면 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속인 자기의 내면이 속아서 그 속은 거짓이 자기의 내면이 되는 기만. 이 배신적 공생, 모순이 한 인간을 끝나지 않을 고독 속에 가둬놓는다. 이것은 세상에 적응하려는 남성성의 확인을 위한 시도로 이어져 매춘여성을 통해 남성의 발흥을 확인해보지만 결코 여성에게는 어떠한 정상성도 발생하지 않는 자신을 확인케 할 뿐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 정체성, 변할 수 없는 동성애적 기질의 진실에 사회적 공감을 요구하는 확신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장인 4장에 이르면 자기기만으로 혼인을 좌절시켜야만 했던 친구의 여동생 ‘소노타’와의 정신적 불륜을 이어 나감에 따라, 타인의 아내가 된 그녀와의 만남이 귀결되어야 하는 성적 결합의 기대를 완성시킬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성애자인‘나’의 심리를 밀도 높게 묘사함으로써 불변적 성 정체성, 그 불가능의 한계를 확고한 진실로 굳혀버린다. 1949년 발표작인 만큼 당대의 일본사회가 동성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이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착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동류의 인간들에게 고립과 가면의 생활을 강요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형식을 띤 이 치열한 성의 심리학적 폭로는 자기변호에의 안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주류사회에 강력한 설득을 이루어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제아무리 자기 감상에 냉소를 보내지만 육체의 그 실체적 감각을 과연 영구히 배반할 수 있을까?하고.
한편 이 작품의 미학적 묘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교시절‘오미’라는 어떤 시원적인 거친 야만성, 탄력 넘치는 근육과 터질듯이 굽이치는 혈류의 활기참, 그 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동급생에 대한 성적 갈망의 관능적 터치나, 상상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모순적 성희의 묘사, 정신과 육체의 배반적 반응, 성적 갈증과 죽음의 임박성이 동일선상에서 작동하는 그 악마적 쾌락, 내면의 무수한 기만과 합리화의 심리적 작용들이 애틋하다 못해 사무치는 진실성으로 미적 승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감각의 화려함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긴장, 춤추는 듯한 이야기의 기복이 가져다주는 쾌락적 요소들은 어떤 만개한 아름다움으로 빠져드는 환각조차 들게 한다. 동성애란 소재를 통해 심약한 인간 정신의 한계를 돌파해보겠다는 호기로운 이 시도는 이처럼 소설적 성공에 동의하게 한다. 그러나 육체를 정신과 분리한 이원적 구조 속에서 통제의 논리로 냉담함을 유지한 그의 시선은 실패한 것이 아닐까?...
<인상과 풍경>을 쓴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서문에서 개인은 각자 유일한 동시에 수많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남자의 지극정성으로 빚어낸 내밀한 고백으로 읽히는 <가면의 고백>을 읽으며 어째서 나는 그 구절을 떠올렸을까. 마흔 다섯에 할복(割腹), 탐미주의의 끝, 고백문학의 진수, 죽음과 강함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동성애적 성향이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더 알아야 할 만한 것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한 작가가 가진 정치성향이나 지독한 국수주의자로서 할복자살한 일 같은 것 말이다. 작가와 작품을 어느 정도 떼어놓고 읽어야 할지 제대로된 판단이 서지 않은지 오래다. 그것만으로 작품을 멀리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내가 그가 스물 네 살에 발표한 첫 장편을 오래 전 매료되었던 <금각사>의 감동을 기대하며 읽는 일은 다소 고문후유증을 감내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달뜨게 화끈거리는 얼굴로 입으로는 미처 내뱉기 힘든 것들을 엿보는 느낌에 가까운 쾌락과 에로티즘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절반 혹은 전체의 투영이다.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로 시작되는 문장. 이 내밀한 고백은 작품 발표시점인 이십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극우성향의 급진적 민족주의 즉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중년 사내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는 체험한 것과 보고들은 것과 느낀 것으로 말한다. 타고난 퇴폐와 향락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고립의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비극을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이는 결국 비극으로 마감한다.
나는 이 세상에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음을 예감했다. 지저분한 몰골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 저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p.18)
병약했던 그는 할머니의 과보호 아래 성장한다. 첫 문단의 '그'는 미시마 유키오이지만 이제부터 쓰려는 '그'는 가면을 쓰고 고백하는 자 '나'이다. 여섯 살의 그는 백마에 올라타 검을 높이 치켜든 잔 다르크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매료된다. 이후에 일어날 피의 부름과 살인 그리고 복수는 그를 흥분케 한다. 강함과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이후로도 계속 되는데 유년시절에서 학창시절까지 내내 덴카쓰와 클레오파트라, 동화와 신화 속에서 비극적 운명에 놓인 왕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자신이 전사하거나 살해당하는 장면을 공상하며 몸을 떤다. 이 명료한 모순을 이해하는 자는 많지 않다.
구이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러니까 <가면의 고백>은 태어날 때부터 보았다는 그의 기억에 의존해 남달리 예민하고 까칠하며 도도하고 시크한 소년과 청년을 묘사해가는 소설이다. 초기의 기억은 열세 살의 그를 찾아온 호기심이자 사랑 아니면 욕구였다. 그에게 세 가지는 모두 동일한 현상으로 여겨졌는데 훗날까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동성애와 나르시시즘 성향의 탐미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피투성이 장면이나 배를 가른 사무라이, 가슴팍으로 피를 흘리는 군인, 탄탄한 근육의 스모 선수를 다룬 그림이나 사진 속에서 느끼는 윤락의 감각과 희열, 동경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느 날 구이도 레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도를 본 후 더 팽팽한 고통과 환희를 느낀다. 그의 고백은 점차 처음의 수치를 잊는다. 가면을 쓴 소년은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을 듯한 남자가 가면 뒤에서 속삭인 어린시절의 고백이 강렬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열광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살아있음의 궁극적 고통. 실존의 극단적 탐미와 웅숭깊은 자기애. 그리고 반란과 파멸의 충동을 오가는 극도의 불안. 이 모든 것이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한때를 불러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을 송곳처럼 찔러대는 유일한 시련은 자기 자신이었다. 조금 더 큰 어른이 되어서 읽는 탐미주의는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바늘에 찔린 듯한 통증과 역한 피비린내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확실히 나는 처음 미시마 유키오를 만났을 때 그를 제대로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내 안의 악마적 충동을 부추기고 자극을 활성화시키며 공포스런 공상을 요구한다.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