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고작 닷 새 휴가뿐인 J의 근무 환경이 나는 싫었다. 완전히 ‘과부 애 키우는 격’이었다. 준이를 낳던 날도 혼자, 백일날도 모든 일을 혼자 치러야만 했다. 수입이 줄어도 좋으니 여유를 가지며 살고 싶었다. 한번 뿐인 인생,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둘러보기만도 바쁘고 아쉬운 시간이 아니던가.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내가 벌 테니 걱정 말고 사표 내!” 나의 큰 소리에 힘입어 J는 용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준이의 돌맞이 여행과 함께….준이가 한 살이 되던 해, J는 결국 신문사를 나왔다. 틀에 박힌 중견 신문기자로서의 일에 염증을 내던 그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부추긴 건 바로 나였다. 사흘마다 돌아오는 야근에 퇴근시간 9시, 일 년에 고작 닷새 휴가뿐인 J의 근무 환경이 나는 싫었다. 완전히 ‘과부가 애 키우는 격’이었다. 준이를 낳던 날도 혼자, 백일날도 모든 일을 혼자 치러야만 했다. 수입이 줄어도 좋으니 여유를 가지며 살고 싶었다. 한 번 뿐인 인생,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둘러보기만도 바쁘고 아쉬운 시간이 아니던가.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내가 벌 테니 걱정 말고 사표 내!” 나의 큰 소리에 힘입어 J는 용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준이의 돌맞이 여행과 함께… --- p.17
초등학교 교사로 20여 년을 살다보니 나는 세상을 교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세계를 찾아가 여행은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도 아울러 불러 일으켜 주었다. 유치원부터 세계지도와 가까이 하는 서구의 교육과정과 달리 우리나라 교육 과정에서 세계 이해에 대한 교육은 6학년 사회 교과서에 잠깐 나올 뿐이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세계의 문화를,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지를 가르치기 위한 나만의 세계 여행 교육 과정을 만들었다.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세계 여행 교육을 처음 시작한 것은 준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부터였다. 처음 시작했던 세계 여행 수업에서 아이들은 세계의 종교, 문화, 지리, 역사 이야기가 녹아들어간 여행지 이야기를 무척이나 흥미로워 했다. 이슬람교를 설명할 때면 필리핀 바다 위에서 무슬림의 의무인 살라트를 목격했던 일을, 힌두교를 설명할 때면 쥐 사원의 광경을 말해주었고 남미의 마추피추 사진과 함께 잉카 문명의 최후를 이야기해줬다. 한 학년이 지나 헤어질 때면,
아이들은 다른 교과목은 생각도 나지 않는 듯 ‘세계 여행'이 가장 재미있었다, 또 듣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에서 교직은 직장과 가정을 병립할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일 것이다. 게다가 모두가 부러워하는 방학이 있다. 교사이면서 엄마인 나는 여행도 교사의 시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의 경험도 쌓여갔고 준이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짜는 노하우도 생겼다. 내가 계획하는 여행은 뭔가 남는 것이 있는 여행, 유익한 여행, 의미 있는 여행에 초점이 맞춰졌다.--- p.313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여행을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유익한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외국인과 말을 섞기 싫기 때문이며, 세 번째 이유는 그냥 귀찮아서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무 생각없이 부모님만 따라 다녔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점점 여행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행을 싫어하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 아닌가 싶다. 5학년 때 인도네시아에서, 6학년 때 티베트에서 고생을 하면서 점점 여행을 재미없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여행을 본격적으로 거부하고, 피하기 시작한 때는 중학생 때부터다. 내 거부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 여름에는 유럽 패키지여행을, 겨울에는 남미 크루즈를 갔다 왔다. 이 두 여행은 모두 외국인과 한 배를 타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공통점은 외국인과 말을 섞기 싫어하는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이 여행들, 특히 남미 크루즈를 통해 나는 해외여행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아직까지 사춘기적 성향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면서 얻은 초등학교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자유는 나를 바뀌게 만들었다. 그 때 나는 매 방학마다 갔던 해외여행에서 슬슬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고, 부모님은 내가 여행을 가기 싫어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하신 채 당연한 듯 나를 여행에 데리고 갔다. 물론 나도 그 당시에는 그 명을 거역한다는 발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모습을 바꿔 준 중학교 시절에서 그 절정기는 2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2학년 때는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별 것 아닌 것 싶은 게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런 모든 변화를 의미있게 평가한다. 그 때부터 나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나의 옷을 샀고, 나의 여가를 즐겼으며, 본격적으로 부모님을 속이기 시작했다. 2학년을 거침으로써 나는 나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레 부모님과의 대립도 커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대립이 줄어든 것도 부모님은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학교 시절, 자기중심적 생활이 절정이었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중3에 들어가면서 내 생활은 다시 암흑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가 없진 않았지만, 진정한 친구라기보다 그냥 하루하루 PC방이나 같이 가는 친구들뿐이었다. 학교에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도 않았고, 성적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그렇다고 행복한 날을 보내지도 못하던 그러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나는 내 정신의 지평이 넓어진 것을 느낀다.
요즈음 나는 계속해서 내 안의 무엇인가가 바뀌어 가는 느낌이다. 부모님도 전처럼 막 대하지 않고,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고 노력도 해보고 있다. 중학교 시절, 완전히 끝장을 달리던 시절에서 벗어나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도 그렇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에라도 나아지기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암흑기라고 폄하되었던 중학교 시절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초등학교와 그 이전 시절에 쌓았던 교양과 지식, 중학교 때의 경험한 자유와 방탕이 융합되어 오히려 지금의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 p.263
결국 나는 어떤 아들을 바라고 있었나.준이를 낳고 키우면서 단 한 번도 공부로 일등 하길, 돈 많이 벌고, 일류 회사에 들어가길 바란 적은 없었다. 그저 준이가 행복하길, 자기가 원하는 길을 찾길,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초등학교 땐 음악과 미술, 운동을 통해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자랐으면 싶었고 중학교 땐 기초만 다져놓으면 된다고 말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자기 스스로 필요성을 느낄 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준이라는 주체를 나의 가치관에 짜 맞춘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이제 준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강남학군과 특목고에 밀려 대학 입학 실적으로는 조금 밀릴지 몰라도 준이는 자기 학교를 좋아한다. 대학 못지않게 넓은 캠퍼스, 활발한 동아리 활동, 공부도 축제도 알차고 짜임새 있는 전통 깊은 학교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며 생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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