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의 사람들이 위대한 성자로 생각하는 우리 주지 스님인 아잔 차에게 내가, 스승님은 늘 완전히 깨달은 존재처럼 행동하지만은 않는다고 불평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직도 네 밖에서 붓다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는 여기엔 없어.”--- p.20
대부분의 수행은 자기 몸을 뒤덮고 있었던 ‘용의 비닐’을 벗겨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수행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갑갑하고 흉측한 껍질들로 덮여 있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기도든 명상이든 헌신이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첫 번째 비늘은 우리 몸에 각인된 습관적인 긴장이다. 이때 할 일은 단지 가만히 앉아서 긴장된 부위 - 어깨나 등, 턱이나 다리 등 - 의 경직 상태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삶에서 갈등이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몸을 위축시킨다. 그리하여 빌헬름 라이히가 말하는 ‘성격적 갑옷’이 형성되는 것이다. --- p.56
성 요한에 따르면, 먼저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입맛을 잃는 ‘김각의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이것은 심각한 상실의 기간이다. 과거에 위안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다. 가장 찬란한 영광을 맛보고 나서 우리는 가슴의 길에 대해 분명히 알지도 못 한 채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들어간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기간을 자만과 탐욕과 노여움으로부터 인격을 정화하는 인내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 ‘감각의 어두운 밤’ 다음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여기서는 더욱 깊은 정화와 복종이 요구된다. 이곳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욥의 심판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혼란과 비탄의 연옥이다. 이 정화의 과정으로부터 오로지 ‘신’만을 향하는 열정적 사랑과 열망이 일어난다. --- pp.157-158
스즈끼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깨달음 사람은 없다.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이 있다.” 깨달음을 주장하는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깨달음, 깨달음 다음의 또 다른 깨달음에 대해서이다.”--- p.168
지혜로운 항해자들은 정박한 항구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음을 배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숨을 참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은 단지 시작일 뿐. 그것은 여행의 첫걸음이다. 깨달음을 자신의 새로운 정체로 알고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즉시 탈이 난다. 깨달음 후에는 곧 분주한 삶 속으로 돌아가서 여러 해를 살아야 한다. 그때에만 배운 것이 소화된다. 그때에만 온전한 내맡김을 배울 수 있다. --- p.171
언젠가 스즈끼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세 마디의 말로 함축했다. “늘 그렇지는 않다.” 조건은 언제나 변한다. 우리는 정상에서 내려온다. 마라는 돌아온다. 변화의 진리를 받드는 태도는 어둠과 퇴보의 경험을 더 큰 전체의 일부로 포용할 수 있게 한다. --- p.182
배신은 그 자체가 우리의 스승이 된다. 우리는 배신 앞에 절을 올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진실로 다시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배신은 우리에게 사리분별의 지혜를 배우고,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생각과 잘못을 살펴보고, 용서하려고 애쓰도록 강요한다. 이처럼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과제도 드물다. --- p.209
깨달기 이전에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다이난 가타기리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의 요점은 삶에서 달아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정확히, 그리고 온전히.”--- p.227
깨달음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꽃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한데 뒤섞인 이 인간적 현실 속에서 기적처럼 꽃핀다. 어떤 도사도 이 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깨달음이 우리 몸의 취약성을 없애주는 것도 아니다. 붓다도 병을 앓고, 허리가 아팠다. 라마나 마하리쉬, 카르마파, 스즈끼 같은 성자들도 신성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암으로 죽었다. 그들의 본보기는 우리가 병이나 또는 건강 속에서,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몸 안에서 깨달음을 찾아야 함을 보여준다. --- pp.235-236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동문이다. 학교 갈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버스에 태우는 일은 추운 아침에 대웅전에서 염불을 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낫지 않다. 둘 다 매우 지겨운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둘 다 반복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반복과 그 속에서 얻게 되는 좋은 결과는 우리 삶의 행위를 바른 길 위에 올려놓는다. --- p.299
한국의 선사 숭산 스님은 ‘모르는 마음’ 안에 머물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킨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추궁한다. 너는 누구냐?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의식이란 게 뭐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럴 때마다 제자들은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 모르는 마음을 지켜라!” 그 속에 머무르고 그것을 신뢰하라. 기독교의 ‘무지의 구름’이나 도가의 ‘앎을 버리기’처럼 모른다는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지혜가 자라난다.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버스에 태워 등교시키는 일은 추운 새벽에 대웅전에서 염불을 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어느 쪽이 어느 쪽보다 낫지도 않고 더 훌륭하지도 않다. 또한 둘 다 매우 지겨운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의 수행과 일상이 모두 중요하며 사실은 하나라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수행은 삶에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시인·수행자)
잭 콘필드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훌륭한 스승이다. 틱낫한
잭 콘필드는 영적 삶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길벗이다. 다니엘 골먼Daniel Goleman(『감성지능』의 저자)
아름다운 책이다. 그의 언어는 우리의 호흡만큼이나 단순하면서도 사랑스럽다.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